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데이터
연번, 문화재명, 문화재구분, 세부종목, 지정분류, 지정일, 지정번호, 관리지자체, 지정사유, 유네스코등재일자, 정의및유례, 전승계보 및 내용 전수교육현황, 중요성 및 의의, 보유자 대표자명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연번 | 문화재명(한글) | 문화재 구분 | 세부종목 | 지정분류 | 지정일 | 지정번호 | 관리지자체 | 지정사유 | 유네스코 등재일자 | 정의 및 유례 | 전승계보 및 내용_전수교육현황 | 중요성 및 의의 | 보유자_대표자 |
1 | 진안고원형 옹기장 | 공예 | 옹기제작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57 | 진안군 | 전통방식의 옹기제작은 밑일과 물레간일, 건아일, 가마일 등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진안고원형 옹기의 특징은 성형과정과 번조기술이라고 함 보유자는 옹기 제작과정의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잘 재현하고 있음 | 옹기(甕器)의 단순히 그릇의 형태로서의 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질그릇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독을 비롯하여 소래기·단지·시루·약탕기 등 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생활용기를 말한다고 함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옹기는 17세기의 철화백자 가마터인 담양 용연리, 대전 정생동 요지에서 발견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종래의 질그릇도 표면에 약토를 입힌 옹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고 함. 이러한 옹기는 18,19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의 요구에 따라 일상생활에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에 따라서 형태와 무늬 등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다고 함 진안고원형 옹기는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흙그릇의 본령을 오늘날까지도 이어왔다고 볼 수 있음.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로서, 특히 진안고원에서는 옹기의 몸을 이루는 태토가 많고, 땔감이 풍부하여 옹기생산이 왕성하였다고 함현재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의 손내옹기도 옛날 화려했던 진안고원 도자문화의 전통과 그 맥을 같이하며, 마을 지명과 관계된 지역옹기의 역사성과 지속성이 현재까지도 진안고원형 옹기를 생산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함 | 옹기는성형과정에서도구를적극적으로이용한다는것과형태에서자기완결을이룬다는것이요소화되어왔음.따라서옹기장은도구를직접만들어몸에맞추는것을중요시해왔음전통방식의 옹기제작은 밑일, 물레간일, 건아일, 가마일의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현재 이어지고있는진안고원형옹기제작상특징은성형과정과가마번조기술이라고함먼저밑일은원재료인자연상태의점토를성형에적합한성질로만드는일로써,좋은생질을 파와서비바람을맞히며공터에부려두었다가,반죽하여성질을고르게하는공정이라고함물레간일은 장독의 성형은 기본적으로 바닥 만들기부터 시작하여 기벽을 쌓아 몸체를 구성하고, 전을 잡아 구연부를 완성하면서 마무리됨. 특히 전을 잡는 것은 옹기제작의 가장 핵심적인 공정이자 성형의 마지막 단계라고 함건아일은 기물을 건조시키고, 유약을 입혀 성형된 기물을 손질하고 관리하는 건해작업으로써, 크기가 큰 장독을 위주로 제작이 이루어지는 진안고원 옹기점에서는 제작의 전 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함가마일은 땔감 준비와 기물의 마지막 건조, 번조까지 전체 제작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됨. 장작가마를 재임할 때는 굄돌과 백토를 이용하여 가마 내부의 수평을 맞추고, 기물을 쌓는 기술이 중요한데, 가마구조와 효율적인 번조를 위한 공간확보, 기물에 가해지는 열, 파손 등을 고려하여 기물의 배치를 달리한다고 함 | 옹기는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함께 부르는 말로써,도자기의절반인도기를아우른다고할수 있는데,진안고원형옹기는여러시대를관통하면서도흙그릇의본령을오늘날까지도이어왔다고볼수있음오랜 역사성을 가진 옹기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서 급속히 사리지고 있음을 볼 수 있지만, 옹기는 통기성을 비롯하여 발효성·경제성과 쓰임새가 다양하다고 함.옹기는 높은 온도로 가열됨에 따라 옹기의 기벽에 함유되었던 결정수가 빠져나가면서 기공이 생성되어 옹기의 외부와 내부 사이로 공기가 통하게 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숨쉬는 그릇으로 인식되었다고 함.또한 옹기 기벽의 기공이 내면에 형성된 불순물을 밀어내는 작용을 하게 되어 내용물이 부패하지 않고,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뛰어난 저장능력을 갖는다고 함.우리나라 식품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발효식품은 대부분옹기 안에서 숙성하게 되므로, 술독이 젓독 등이 그 예라고 함옹기는 일반 서민들도 크게 부담되지 않는 싼 가격에 거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제성 때문에, 옹기는 오래도록 우리의 생활용기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고 함옹기제품은 주로 식생활 용기를 비롯하여 생업용구, 의례용구, 악기류 등이 있으며, 옹기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잇기도 하였다고 함 | 이현배 | |
2 | 민속목조각장 | 공예 | 공예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58 | 전주시 | 전통목공예는 다양한 목재를 사용하여 목침, 필통, 능화판, 떡살 등을 사용 용도 및 필요에 따라서 적절한 형태로 만들어 사용해 왔음 보유자는 이러한 작업과정의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재현하고 있음 | 목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 및 조선시대 태종실록에서도 목침의 사용과 효능에 대해서 장수의 비결과 격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음. 또한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목침의 기록이 보이고 있음은 목침이 생활속에서 꾸준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함 필통은 대개 1·3·5·7의 홀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수를 세는 단위를 형제로 칭했다고 함.예를들어서세개짜리면삼형제,다섯개짜리면오형제,일곱개짜리면칠형제등의식으로부른다고함.오늘날현존하는필통유품은조선시대이후의것이지만,어떠한형태로든지붓을보관했을것이므로,필통은붓의사용시기와거의비슷한시기부터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고함. 능화판(菱花板)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려말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관련유물이 남아 있지 않음. 불경이 중심을 이룬 고려시대에 목판인쇄의 경험과 기술이 사찰에 집중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능화판의 제작이 처음 이루어진 곳이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함 떡살의 다식판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상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후기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일상생활에 소용되는 가구기물의 명칭과 특징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고 함. 이중에서 떡살과 다식판은 일상용품은 아니지만, 기원·제사·잔치 등에 필요한 떡과 전래 차 문화와 관계되는 것들이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함 | 전통목공예는목재의종류도목리(木理)가뚜렷한것과그렇치않은것을적절히활용했다고함무늬가뚜렷한오동나무,먹감나무,소나무,느티나무,참죽나무등은나무를그대로받아들여 자연에가깝고,토속적인한국의미를잘표현했음.반면에목리가없는피나무,은행나무,박달나무,대추나무등은적절한형태를만들고접목하여어울리도록하였다고함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전북과 전주에서는 필통이라는 선비들의 문방유품이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손꼽히고 있음. 특히 필통은 종이와 붓과 함께 문방기물이라는 점에서 전통문화로서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함전통목침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목재를 용도에 맞게 적절히 이용한 제작기법은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고도의 숙련된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함. 전통목침은 오동나무, 소나무, 편백나무, 박달나무, 먹감나무, 피나무 등 국내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소재로 하여 제작하고 있다고 함능화판은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부터는 목재를 이용한 목판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더불어 장식성과 예술성을 높힌 능화문 사용을 촉진하게 되었다고 함떡살은 먹는 음식에 전통적 가치와 상징을 담는 경우라는 점에서 그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에, 매우 요긴한 소재가 되어 제작되었다고 함1981년부터1987년까지목아박천수로부터목조각기능을사사받았으며,1988년에전주에내려와공방을세워독립하면서전통공예작품활동과함께전라북도전승공예연구회,(사)전라북도전승공예협회,온고을전통공예공모전등에적극적으로참여하여전통목조각의보존전승을위해힘쓰고있다고함 | 현존하는목재나죽제품의필통이주로조선시대이후의것이지만,그이전의도제품이나석제품등필통의연구와함께목제필통의연구는붓과더불어필통을사용한문인사대부등의호문(好文)풍조와문화상등을이해하는데그가치가인정되고있다고함전통목침은 그 형태에서 드러난 조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새겨진 문양에 대한 정신세계나 생활양식 등 한국문화를 연구하는데,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고 함.능화판은 그 기능면에서 책출판의 융성과 함께 예술적 가치를 연구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하겠음. 특히 전주의 경우, 완판본 출간 등 출판의 역사적 의미가 큰 지역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함떡살은 농경문화가 발달하고 주요 곡물의 생산이 풍부하여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의 음식문화 발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함 | 김종연 | |
3 | 색지장 | 공예 | 색지공예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60 | 전주시 | 색지공예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사용하여 천연염료로 색깔을 내어서 나무나 합지로 만든 골격을 만들어서, 그 위에 색지를 여러 차례 덧발라서 문양을 넣는 작업이라 하겠음 보유자는 작업과정의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잘 재현하고 있음 | 색지공예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천연염료로 색색이 물을 들여서 미송이나 오동나무 또는합지로만든골격에수차례에걸쳐서덧발라서문양을넣는전통공예작업이라하겠음한지는 지질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며, 질겨서 잘 찢어지지 않고, 냄새가 향긋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함이러한 한지를 주재료로 하여 음양오행설에 의해서 적·청·황·흑·백색 등 오색을 기본으로 하여 장, 함 반짇고리, 상보, 빗접, 담배쌈지, 예단3합상자, 고비 등의 혼수용품을 만들었다고 함이때는색지공에품을전문적으로만드는장인(匠人)이있어서주문생산하거나또는직접팔기도하였다고함색지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종이가 가장 성행하였던 조선중기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후기까지의 유물을 통해서 보면 양반층과 서민층들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함 | 색지공예의기본재단법은대체로사각류재단,원형재단,육각·팔각·십각류상자재단등이있음그리고 문양 제작법은 색지공예에 있어서 문양은 매우 중요한 공정으로서, 문양을 조각하고 오려서 붙이는 정도에 따라서 작품의 우수성이 평가된다고 함한지를 이용하여 색지공예품을 만들면 보푸라기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풀을물과1/10정도잘섞어서칠을해주면,보푸라기가없어지고매끈해진다고함그 다음에 잘 건조시켜서 콩기름, 들기름, 잣기름, 동백기름, 호도기름, 옻칠 등을 칠해주면 견고성이 높아진다고 함색지공예는 기물의 형태에 따라서 만드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데, 사각상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⓵먼저 그림의 크기와 같이 90도 각도로 정사각형을 제도함. ⓶제도된 곳을 칼을 사용하여 오려냄. ⓷검정선 부분을 반칼을 사용하여 오려냄. ⓸접혀서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에 원하는 색지를 바름. ⓹바른 다음에는 반칼한 부분을 접음. ⓺겹쳐진 점선 부분을 접착제로 붙임. ⓻다 붙은 다음에는 칼을 사용하여 모양을 다듬고, 그 위에 초배지를 붙임. ⓼태극문양을 오려서 작품을 완성함. ⓽폭 1㎝ 정도의 검정선이나 청색계통으로 띠를 둘러줌. ⓾풀을 물과 1/10 정도 잘 섞어서 물풀을 칠해줌. ⑪다 마른 다음에는 콩기름, 들기름, 옻칠 등을 칠해줌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고 함1987년부터한지공예에대해서관심을두기시작하여상기호로부터한지공예를사사하였고, 1990년에는 최영준으로부터 지승기법을 사사하였다고 함1990년대 중반부터 전라북도 각 대학교의 평생교육원을 비롯한 여성회관, 교육청, 공공도서관, 시민대학 등에서 한지공예의 전승을 위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 | 색지공예는내구성과내습성을강화하기위하여칠을하는데,옛날에는들기름,우뭇가사리,잣기름,동백기름,옻칠,피마자기름을사용하였다고하며,특히콩댐을주로사용하였다고함색지공예는 목기나 나전칠기 제품에 비하여 화려하고 담백한 멋을 문양과 함께 나타낸다고 함.색지공예에사용된문양은서수서금문양(瑞獸瑞禽文樣),서화서초문양(瑞花瑞草文樣),길상문양(吉祥文樣),자연상징문양(自然象徵文樣),기하학적문양(幾何學的文樣)등과인물,단청,민화등도즐겨사용하였다고함종이를 재료로 한 색지공예는 실용성과 장식성을 함께 요구하는 현대 생활용품에 적합한 소재로서, 제작기법이 간단하며, 색상과 문양도 다양하고, 재질리 포근하면서 단단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함특히 한지로 여러 겹 덧발라서 멋을 더하는 색지공예의 문양은 색체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며, 그 도안 자체가 순수 민간신앙 등 소박한 소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성과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함 | 김혜미자 | |
4 | 지승장 | 공예 | 지승제조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61 | 전주시 | 지승공예는 종이를 끈으로 만들어 여러 가지 방법과 문양으로 엮어서 다양한 형태의 기물을 제작하는 작업이라 하겠음 보유자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유물들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재현하고 있음 | 지승은 노엮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종이를 끈으로 만들어 끈을 여러 가지 방법과 문양으로 엮어만드는것이라함지승(紙繩)의 지(紙)는 종이를, 승(繩)은 노라는 글자로써, 노라는 말의 뜻은 칡껍질(청올지),마(麻),종이등을가늘게비비거나꼬아서만든끈이라함노엮개의 엮개는 이 끈을 엮어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함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기에 글씨연습을 하고 버리게 된 종이를 모아 두었다가 창호를 바르는데 사용하거나, 버리게 된 휴지를 모아 지승기법으로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이용하였다고 함조선시대에는 헌책을 뜯어내어, 이것을 이용하여 지승그릇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그래서 한 때는 소중한 책을 함부로 다룬다고 하여 지승그릇을 엄금하는 일도 있었다고 함지승망태기, 지승필통, 바구니, 망태, 상, 요강, 옷 등을 만들어 옻칠을 입혀서 사용하였다고 함 | 지승공예는엮어서기물을만드는공예이므로모양과크기에별다른구애를받지않는다고함간격을 좁게 잘라서 지노를 가늘게 꼬면 실이 되고, 간격을 넓게 잘라서 지노를 굵게 꼬면 줄기가 되어 왕골, 짚, 대나무 등을 엮어서 만드는 공예품 등을 지승으로 제작이 가능하다고 함보통 지승공예품이라 함은 바구니나 그릇 같은 생활용품 등을 볼 수가 있는데, 관련유물을 살펴보면 바구니, 그릇, 망태기, 자리, 상, 함 같은 생활용품 이외에도 서류상자, 필름 같은 문방규류, 제기, 주병 같은 제례용품, 화살통, 화약통 같은 군사용품, 등거리로 입었던 종이옷과 사치용품으로 널리 애용되었던 미투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함재료의 특성상 가볍고 질겨서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뿐만 아니라, 종이가 주는 독특한 질감, 가볍지만 중후감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다고 함한 올 한 올마다 오랜 시간 들인 정성이 보이고, 겹심을 중심으료 외올심을 엮어서 나오는 선은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함1985년부터한지공예에대한관심을두기시작하여지승공예를시작하게되었으며,2004년에대학원에진학하여지승공예에대한강의를받는등의다양한활동을계기로본격적으로연구하게되었다고함그 후 관련유물을 재현하고자 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개인공예전, 각종 전시회 등을 통해서 지승공예의 활성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 | 지승기법은여러가지도구가필요없고,재료도한지만있으면가능한공예라고함.그러나그기법은왕골공예,짚공예,대나무공예등에서보여지는모든기법을포함하고있으며,전통매듭에서그물짜기기법과미투리삼기등많은기법이있다고함종이가 보편화되면서 양반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두루 성행하게 되었으며, 각자만의 솜씨와 미적 감각으로 용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함지승공예는 종이를 엮는다는 데에서 오는 재질적 특징과 공예품, 생활용품으로서의 표면적인 형태적 특징, 민속 생활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유일한 공예기법이라고 함. 또한 한지의 우수성을 눈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예품이라 하겠음 | 김선애 | |
5 | 전주배첩장 | 공예 | 배첩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62 | 전주시 |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서 족자와 액자, 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과 함께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기법이라 하겠음 보유자는 전통기법에 따라 작업과정의 전 과정을 원형대로 잘 재현하고 있음 |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서 족자, 액자, 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과 함께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기법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표구라고도 하며, 현재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장황이라고 함. 배첩작업을 하는 장인을 배첩장이라고 함일반적으로 서화의 바탕재료는 종이와 비단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재료들은 쉽게 구겨지거나 찢어지고, 좀과 같은 각종 벌레라든가 쥐 등에 의해 손상되고 있음. 또한 습기와 곰팡이로 인하여 쉽게 훼손되기 쉬우며, 시간이 지날수록 부수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함.이러한 물리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배첩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여기에다가 보관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형태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함.또한 좀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욕구가 더해져 족자·병품·두루마리·첩·서적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고 함 | 배첩은 그림 뒤 쪽에 종이를 한 장 한 장 붙이는 것으로 여겨서 작업과정이 단순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우나, 배첩이 간단하게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고 함배첩에서 주로 다루는 제작기법이나 형태는 액자, 병풍, 족자, 장정 및 고서화 처리 등을 주된 작업이라 하겠음.액자는 비단재단, 그림 초배, 건조, 액자 준비, 조립 등의 작업과정을 거친다고 함병풍처리는 환 폭을 처리하는데에도 동일하다고 함. 여러 폭을 연결하기 위하여 삼베나 비단 또는 광목을 재료로 한 돌쩌귀를 엇물려가며 단다고 함족자는 비단 재단, 초배, 겹배, 건조, 삼배 또는 총배, 건조, 축목·반달 부착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장정은 표지나 속지에 손상을 입은 고서의 처리를 말하는데, 속지가 손상된 것은 상태에 따라서 세탁을 거치거나 그냥 배접한다고 함표지의 경우는 그 형식, 재질, 색에 맞추어 표지를 준비하고, 끝으로 붉은 실 한 줄로써 다섯 군데를 맨다고 함고서화 처리는 손상된 고서화를 되살려내는 작업이기에 고도의 안목과 정치한 기술을 갖춘 배첩의 최고 경지를 요한다고 함. 그 작업과정은 분해, 가배접, 건탁, 습탁 세탁, 배접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손상된 서화부분에 붓을 대는 수정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함1964년 17세부터 서재영으로부터 표구에 입문하여 현재 50여년 동안 기린산방을 운영하고 있으며, 또한 장황문화재연구원을 설립하여 전통기법을 원형대로 보전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 | 전통적인 의미의 배첩은 손상되고 훼손된 서화를 보존하고 복원하여 다시 되살리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함. 전통시대에는 어진을 그려 봉안하는 것이 중요한 국가적 사업의 하나였으며, 제작된 어진에 대하여는 지속적으로 상태를 살피고, 훼손된 것이 있으면 이를 고치거나 보존처리를 하는 것이 바로 배첩의 주요 업무였다고 함.오늘날까지 전통시대의 서화가 온전히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바로 배첩 때문이라 하겠으며, 손상되거나 훼손된 서화는 다기 재배첩의 과정을 거쳐서 그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함 | 변경환 | |
6 | 여산호산춘 | 술 | 호산춘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64 | 익산시 | 여산 호산춘은 익산시 여산의 연안이씨 문중에서 전해내려오는 가양주로써, 서유구의 삼림경제와 이규경의 오주연장문산고에서도 조선의 명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함 보유자는 호산춘 제조과정의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잘 재현하고 있음 | 호산춘(壺山春)은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1891∼1968)의 25대 조부인 이현려(1136∼1216)가 1156년(고려 의종 10년)부터 1203년(고려 신종 6년)까지 47년간 판소부 감사겸 지다방사(궁중의 살림, 특히 음식관리)로 있으며서 궁중에서 빚던 술이라 전해지고 있음연안이씨 판사공파 이현려의 후손들이 천호산(天壺山) 주변인 여산, 금마, 왕궁, 충남 논산, 양촌 등에 거주하므로, 이들이 빚은 술로 이 산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 이름을 따서 호산춘이라 불렀다고 함여산 호산춘은 서유구(徐有榘)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그 제조방법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함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조선시대 명주로 평양 감홍주, 한산 소곡주, 홍천 백주, 여산 호산춘 등을 극찬하고 있다고 함 | 좋은 술을 가리켜 명주라 하고, 명주 중에서 술이 독하고 향과 색이 좋고, 맛까지 좋은 술을 춘주라고 한다고 함호산춘은 다른 술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빛깔이 맑으며, 과실향이 나고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함술 빚는 순서는, 첫째, 밑술은 섣달 그믐날 설날의 떡빚기와 함께 쌀가루를 이용한다고 함, 둘째, 1차 덧술은 정월 초사흗날 고사떡의 쌀가루와 함께 쌀가루를 이용한다고 함, 셋째, 2차 덧술은 정월 대보름 오곡밥 준비와 함께 고두밥(찹쌀)을 이용한다고 함, 넷째. 발효는 따뜻한 방에서 3일 동안 발효시킨 다음에 차가운 방이나 대청에 옮겨서 발효시킴으로써 완성된다고 함.특히 여산의 호산춘은 다른 여산춘과는 달리 밑술과 덧술, 덧술과 2차 덧술을 섞지 않고 위에 덮는 방법으로 술밑을 빚는다고 하며, 밑술은 죽을, 덧술은 쌀가루에 끓인 물을 부어서 익히는 방법을 사용하며, 2차 덧술은 고두밥으로 하며, 세 차례에 걸쳐서 누룩을 넣는다는 점이라고 함1975년부터 이연호는 어머니 이경호로부터 술빚는 법을 전수받아 40여년간 보존해오고 있으며, 2007년부터 전국의 농업기술센터와 술교육기관 등에서 전통주 및 발효식품 제조방법 등을 전수하고 있음현재 전통발효연구회 회원 40여명이 매년 개인별 5회 이상 호산춘 빚기를 하고 있으며, 2015년부터는 호산춘 빚기대회를 개최하여 호산춘의 보존 전승을 위해 힘쓰고 있음 | 호산춘은 다른 술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빛깔이 맑으며, 과실향이 나고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함밑술과 누룩을 걸러서 빚으므로 누룩냄새가 없고, 술이 상쾌하므로 고급술로서 품격이 높다고 하며, 또한 술 빚는 방법이 다른 술과는 다르게 과학화되었다고 함. 첫째, 밀가루를 넣어 젖산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함, 둘째, 밑술을 걸름으로써 곡물의 껍질들이 없으므로 누룩취가 없다고 함, 셋째, 대청이나 차가운 방에서 발효시키므로 좋은 향을 얻을 수 있다고 함, 넷째, 2차 덧술 때에 누룩을 추가하므로 12일간에 손실된 효모를 보충하므로 발효에 도움이 되고, 물누룩을 넣으므로써 누룩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함, 다섯째, 맑은 술만 작은 용기에 담아 삼베나 무명천에 황토를 발라 뚜껑을 덮으므로 알콜 증발을 방지한다고 함, 여섯째, 땅 속 큰 항아리 속의 낮은 온도에서 숙성되므로 술이 맑고 향기도 유지되며, 부드러운 맛을 낼 수 있다고 함 | 이연호 | |
7 | 야장 | 공예 | 야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9-06-07 | 65 | 전주시 | 대장장이는 무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대장간은 대장일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 보유자는 작업과정의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잘 재현하고 있음 | 대장장이는 무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사람이며, 대장간은 대장일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함대장간=대장일+곳(간)을 의미하며, 대장장이는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유어라고 함.철, 구리,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서 연장과 가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는 딱쇠, 대장장이, 성냥, 바지, 야장(冶匠), 철장(鐵匠)이라고 함.고대사회부터 있었던 야장은 중앙 및 지방부서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고 함.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에 야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태종때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는데, 선공감(繕工監) 소속의 야장이 숭례문의 행랑 등을 수리하기 위해 다른 장인과 함께 동원되었다고 함.조선시대에는 야철장(冶鐵匠), 철야장(鐵冶匠), 노야장(爐冶匠), 철장(鐵匠), 철공(鐵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며, 모든 장인의 대장이라고 의미의 대장장이라고도 하였다고 함원래 야장(冶匠)은 좁은 의미로는 쇠를 가지고 각종 무기나 도구를 만드는 장인으로 무쇠를 생산하거나, 무쇠로 된 솥이나 도구 등을 만드는 수철장(水鐵匠)이나 주물을 하는 주철장(鑄鐵匠),놋쇠로 기물을 만드는 유철장(鍮鐵匠)과는 구분될 수 있으나, 이러한 장인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함. 경공장(京工匠)에는 사기장(沙器匠)을 제외하고, 외공장(外工匠)의 경우에도 지장(紙匠)을 제외하고는 배속된 야장(冶匠)의 수가 가장 많았다고 함 | 대장장이가 만드는 물건은 주로 전통칼과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 그리고 생활용품들이라고 함. 대체로 시대가 변함에 따라 농사 도구보다는 소품 등을 전문으로 제작하기도 하지만, 보유자는 스승에게서 배운 전통방식을 고집하면서 손수 만들기 때문에 그 가치가 있다고 함작업과정은 먼저 풍로 화로에 불을 피워서 쇠를 달군 다음에 메질과 담금질을 계속하면서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서 시우쇠를 토막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함깜을 잡은 다음에는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수메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 다음에는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서 자루를 박아 완성시킨다고 함1960년 16세부터 아버지 김한기로부터 대장장이 전과정을 사사받았으며, 1974년에 서서학동에서 대장농기구를 윤영하다가, 1996년부터 한일민속대장간을 운영하면서 전통기법대로 다양한 농기구 등의 생활용품을 제작하고 있음 |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차, 숯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함. 그리고 대장간에 없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루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고 함작업과정에서 시우쇠와 풀무질은 중요한 과정이라고 함. 먼저 시우쇠는 중국에서 건너온 숙철(熟鐵)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철은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 강철과 함유량이 적은 연철로 나뉘어지는데, 바로 연철이 시우쇠이며, 시우쇠는 무쇠를 불려서 만든 쇠붙이를 의미한다고 함풀무는 대장간에 가면 볼 수 있는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로서, 골풀무와 손풀무의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함. 골풀무는 발로 밟아서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를 골풀무 또는 발풀무라고 한다고 함, 손풀무는 손잡이를 밀고 당기는 방식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허풍선(虛風扇)은 손풀무의 하나로서,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일을 풀무질이라고 함현재는 대장간과 대장장이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음. 그러므로 전통방식대로 쇠붙이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기능을 보존하고 전수할 필요성이 있다고 함 | 김한일 | |
8 | 매듭장 | 공예 | 매듭공예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22-08-19 | 66 | 전주시 | 매듭은 끈을 소재로 하여 그 끝을 여러 가지 문양으로 맺는 수법의 하나로써, 한 가닥 또는 두 가닥 이상의 줄을 사용하여 맺고, 짜는 섬유제작 자체를 총칭하고 있음 보유자는 매듭의 작업공정 전 과정을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잘 재현하고 있음 | 매듭은 끈을 소재로 하여 그 끝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맺는 수법의 하나로써, 한 가닥 또는 두 가닥 이상의 끈이나 줄을 이용하여 맺고, 짜는 섬유제작 자체를 총칭한다고 함대부분의 매듭은 앞 뒤 모양이 똑같고, 중심에서 시작하여 중심에서 끝나며, 좌우 대칭을 이루는 형태라고 함우리나라 전통매듭의 기원은 기원전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농경시대부터로서, 유물을 통해 농경에 필요한 도구와 함께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함이처럼 매듭은 실생활에서 환경적응을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기능성과 미적인 요소가 더해지면서 삼국시대에는 더욱 장식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고 함. 즉 매듭의 시작은 장식적인 요소보다는 실생활에 필요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함 특히 삼국시대에는 전통매듭이 생활 전반에 사용된 시기로서, 매듭의 형성기라 할 수 있다고 함. 실용적인 목적의 매듭은 점차 장식적으로 변하여 각종 기물과 복식에 매듭을 달아 주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고 함고려시대에는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서 알 수가 있으며, 유물을 통해서도 다양한 구성과 모양을 갖춘 매듭장식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함조선시대에는 전반적인 실생활에서 다양한 용도와 종류의 매듭이 사용되었다고 함 | 우리나라의 매듭은 38종류의 기본형을 가지고 있는데, 각 기본형의 형태는 다르지만, 매듭을 맺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일정한 길이의 끈을 반으로 접어서 중심을 잡고, 그 두 가닥을 질서있게 엮어서 균형을 맞추어 조인다고 함. 이 크고 작은 매듭을 보기 좋게 배열하며, 수직으로 연속 구성하고, 끝에는 술을 유연하게 늘어뜨린다고 함매듭은 직선과 곡선, 색상, 비례는 매듭과 짝을 이루는 의복이나 소지품들과의 관계들 상호간에 조화를 통해 표현한다고 함매듭은 기본적으로 좌우대칭의 형태를 이루며, 단독무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함. 매듭의 종류에 따라 좌우, 상하 대칭을 이루는 구조를 가지는 매듭도 있다고 함. 생쪽매듭과 삼정자매듭, 장구매듭, 매화먀듭 등 대부분의 매듭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좌우, 상하 대칭구조를 가지는 매듭은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는 매듭과 정사각형의 수의 개념도 나타나는 다이어몬드 형태의 십일고매듭, 석씨매듭, 사색판매듭, 난간매듭 등이 있다고 함여러 가지의 매듭으로 구성된 유소는 윗부분은 작은 매듭으로, 아래로 갈수록 매듭의 크기가 커지도록 디자인되어 있어서 안정된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고 함1978년부터 정일영으로부터 매듭을 배우기 시작하여 2013년에는 김희진(주요무형문화제 제22호)으로부터 염색, 끈짜기, 매듭 등을 사사하였음현재는 한국매듭연구회 회원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전승공예연구회를 통해서 전수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음 | 전통매듭은 과거의 생활문화 위에서 매우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함.한국 전통매듭은 장식적 활용요소가 많은데, 장식적 활용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여성의 노리개를 들 수가 있으며, 악기의 유소, 가마의 장식, 초상화의 유소 등 궁중을 비롯한 생활전반에 걸쳐서 품격을 높여주기 위한 생활용품으로 활용되었다고 함특히 복식이나 노래개는 물론 영저악기(鈴杵樂器), 번(幡), 연(輦), 기(旗), 방장(房帳), 영정(影幀), 상여의 유소로서의 장엄 장식으로 사용되었으며, 노리개, 주머니, 허리 끈 등 복식용으로 매듭이 사용되었다고 함이러한 매듭은 복식연구, 장신구 연구, 생활사 연구 등 문화연구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함 | 김선자 | |
9 | 삼베짜기 | 공예 | 삼베짜기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22-08-19 | 67 | 무주군 | 치목마을의 삼베짜기는 전국의 많은 삼베짜기 마을들의 형태와는 다르게 마을 전체의 길쌈전통을 그대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가고 있는 독특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음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2002년부터 40여 가구가 마을 공동으로 씨앗을 파종하여 수확된 대마를 이용하여 삼베제작의 전 과정을 전통방식 및 전통 제작도구를 이용하여 제조하고 있음 | 삼베는 베라고도 불리우며, 한자어로는 마(麻), 마포(麻布), 포(布)라고도 함삼베는 삼국시대의 군산 패총에서 뼈로 된 바늘에 마사가 감긴 것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함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삼베는 일반백성들이 입었던 평상복과 상(喪)을 당했을 때에 입는 상복의 소재, 임금이나 높은 관리에게 바치는 진상품, 임금이 베푸는 하사품, 일반백성들간의 선물, 그리고 복식 부속품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함고려시대에는 기술이 발달하여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문물교환의 수단으로 모시와 함께 사용되었다고 함조선시대에는 면생산이 시작되면서 삼베의 생산이 약간 줄게 되었다고 함. 삼베가 포함되는 마직물은 우리 조상들의 제사(製絲) 기술 등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유리 조상들의 피복소재로 애용되었다고 함치목마을의 삼베짜기는 전통기법으로 한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삼베짜기가 전승되고 있는 지역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함구술로 전해오는 치목마을의 삼베짜기 기술은 전승기간만 해도 족히 100여년 이상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함. |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2002년부터 40여가구가 마을 공동으로 씨앗을 파종하여 수확된 대마를 이용하여 삼베제작 전 과정을 전통방식 및 전통제작 도구 등을 이용하여 제조하고 있다고 함대마의 파종시기는 3월말이나 4월초로 마을 공동작업, 공동으로 경작지 임대를 통한 마을 공동경작, 전통적인 방식인 우경으로 밭을 갈고, 직파방식으로 잎치기, 베기, 단 작업 등을 거쳐서 삶을 장소로 이동한다고 함대마 삶기는 대마베기 작업 후에 바로 실시되며, 이 역시 마을 공동작업의 형태로 이루어짐생산시기는 3월에 파종하여 11∼12월에 수확하여 수의, 베게, 이불, 쿠션, 키걸이 등의 삼베물품을 생산한다고 함전통베틀을 사용하여 공동으로 직조하는 방식으로 원료조달은 마를 공동으로 파종, 수확하여 원료를 생산한다고 함베짜기는 겨울 농한기에 마을 공동작업으로 베틀을 이용하여 2인 1조로 작업한다고 함제품만들기는 연중 계속되며, 이 또한 마을 공동작업 형태라고 함대마경작을 위한 전 과정에서 마을주민이 협동하여 파종, 관리, 수확이 이루어지며, 실 제작 전 과정 및 삼베짜기 전 과정에서 140여일을 모이게 되고, 연간 총 150일 정도를 마을 주민 전체가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고 함삼베짜기는 치목삼베영농조합법인 치목삼베마을에서 대대로 삼베짜기 기술이 전승되고 있음치목심배부녀회는 1988년부터 개인적으로 작업하던 삼베짜기 마을을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경작하고 작업하는 부녀회로 조직되었다고 함이때부터 마을 개개인의 삼베짜기 작업이 점점 쇠퇴하고, 그 인원이 줄어서 명맥을 이어가기 힘들겠다는 판단하에, 삼베부녀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함2005년에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지정되면서 더욱 활성화되어 2011년에 치목삼베영농조합법인으로 조직화되어, 현재까지 마을 공동작업으로 삼베짜기를 공동으로 직조하고 있다고 함 | 삼베짜기는 대마라는 섬유 원료에서 삼베라는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써, 삼베는 건조가 빠르고, 통풍이 잘 되는 열전도성이 커서 시원하다고 함.뿐만 아니라 마찰에 대한 내구성이 커서 세탁할 때에 손상이 적은 장점 때문에, 삼한시대부터 선조들이 손수 길쌈을 통해 입어온 옷감이라고 함치목마을의 삼베짜기는 전국의 많은 삼베짜기 마을들의 형태와는 다르게 마을 전체의 길쌈전통을 그대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가고 있는 독특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음즉 마을 전체가 참여하여 각각의 능력 정도에 따른 분업화가 이루어져서 경작분야, 실만들기 분야, 베짜기 분야 등이 전승기간과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기초에서부터 완성단계까지 전체 과정이 마을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함 | ||
10 | 가야금 병창 | 음악 |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20-06-05 | 49 | 부안군 | 가야금 병창은 조선시대 판소리 명창들 사이에서 판소리 가락을 가야금 반주에 얹어 불렀다는 견해와 가야금 산조를 창작한 김창조(1865-1919)를 시작으로 오수관과 그의 아들 오태석(1895-1953)에 의해 정형화되었다는 추론이 전해진다. 오태석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학습한 박귀희(1921-1993)가 가야금 병창을 예술 장르로 완성하였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박귀희가 지정된다.박귀희 가야금병창 제자로는 남원 출신 안숙선과 오갑순, 강정숙(8살 때 남원으로 이주)을 통해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이 전승되고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 가야금 병창 보유자 박선옥은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박귀희와 오갑순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달영(1922-1997)이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된 이후 사망으로 지정해지되면서 전수조교 강정렬(1950- )이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강정렬 보유자는 전라북도 전주에 거주하면서 오랫동안 정달영제 가야금 병창을 전수하고 있다. 따라서 전라북도 남원 출신 명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 박귀희제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전승 명맥을 유지하고 전승기반 구축을 위해 박선옥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로 지정하였다. 가야금 병창은 낙안읍성 출신 오태석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술장르로 발전되었고 전라북도 지역의 전승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박귀희제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를 지정하여 전북의 전승체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 오늘날 가야금 병창 형성시기와 발생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기에는 한계가 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처음으로 가야금 병창이라는 음악적 행위를 했는지 기록된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말기 판소리 명창들이 여기(餘技)로 시도되었다는 견해와 박황의 『조선창극사』에 제시된 바와 같이 김창조가 처음 만들었다는 논의가 발생 시원(始原)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가야금 병창이 시작된 시기는 대략 19세기 중엽 무렵으로 볼 수 있다.1910년 가야금 병창은 심상건(沈相健: 1889-1965)·심정순(沈正淳: 1873-1937)·박팔괘(朴八卦: 1882-1940) 등 중고제 명창들에 의해 호황을 누렸지만,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오태석(吳太石: 1895-1953)을 중심으로 계면 성음으로 짜여진 남도가락이 가야금 병창이 각광(脚光)을 받기 시작한다. 낙안읍성 출신 오태석의 제자 박귀희(朴貴姬: 1921-1993)가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된 이후 가야금 병창의 큰 주류를 형성하였다.가야금 병창의 전승 계보는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는 김창조를 시작으로 오태석-박귀희-안숙선-강정숙으로 전승계보가 이어지는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과 두 번째는 한숙구-한수동-서공철-정남옥-정달영-강정렬로 이어지는 정달영(鄭達榮: 1922-1997) 가야금 병창 즉 고제(古制)가 있다.가야금 병창은 연주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판소리 중 눈대목 일부분을 소리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가야금 반주와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소리 학습과 가야금 연주기량 모두를 겸비해야만 완성될 수 있는 전통음악 예술 장르이다.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의 음악적 원천은 강태홍(姜太弘:1893-1957)과 오태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심상건과 한성기(韓成基: 1899-1950)와 같은 가야금 병창 명인들의 음악적 영향도 받았다.박귀희 가야금 병창의 소리 구성은 오태석과 강태홍에게 공부한 것도 있지만 유성준(劉成俊: 1874-1949), 박동실(朴東實: 1897-1968), 박녹주(朴綠珠: 1906-1979)에게 배운 부분도 있다.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의 무형적 고유성은 판소리 더늠과 가야금 연주기법이 장단과 선율적 조화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후 수많은 제자가 박귀희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계승하였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박선옥 보유자가 전승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을 전승하고 있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박선옥 보유자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쇠외리 36-6번지에서 전수활동을 하고 있다.전라북도는 정달영-강정렬로 이어지는 고제(古制) 형식의 가야금 병창이 매우 활발하게 계승되고 있는 지역으로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의 전승 명맥을 찾기에는 희소성이 존재한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가야금 병창 보유자 박선옥은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덕림리에서 1954년 출생하였다.전라북도 부안에서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을 계승한 박선옥 보유자 집안의 직계 백부(伯父) 부창(扶唱: 부안지역의 최고의 명창 의미) 박대근(朴大根: 본명 鍾奉)의 묘비가 지역 유지들에 의해건립될 정도로 명망(名望)있는 국악인 집안 출신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백부의 권유로 1969년 전통음악에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오갑순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공연에 참여하였고 수궁가, 흥보가를 완창하였으며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 눈대목과 남도민요를 박귀희 문하에서 전수받았다.본격적으로 체계적인 가야금 병창을 전수받기 위해 박귀희 문하에 입문하여 10여년 동안 전수교육을 받았지만 1993년 박귀희 명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수증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을 알리기 위해 1999년 제17회 전국국악대제전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후 전라북도에서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을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에 부안에 전수관을 개설하여 14년 동안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을 전수하고 있다. 고향 부안으로 귀향하여 지난 시간 백부가 전통음악을 위해 노력한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현재 부안 전수관에서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전통음악을 보급하고 있으며 지역민들에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을 보급하고 있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박선옥 보유자는 박귀희와 오갑순에게 가야금 병창을 전수받았다.박귀희의 가야금 병창에 영향을 미친 오태석과 강태홍의 음악적 유산도 물려받았을 것이며, 초기 스승이었던 오갑순의 음악적 영향도 받았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9-1호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박선옥 보유자는 2020년 지정고시되었다. 따라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지정고시 이후 전수생 교육은 진행할 수 있지만 전수교육 기간이 3년 경과 되지 않아 아직 이수자를 배출할 수 없다. | 19세기 초 흥행하기 시작한 가야금 병창은 초기 심상건·심정순·박팔괘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1930년대 이르러 전승 명맥이 모호해졌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가야금 병창은 낙안읍 출신 오태석을 기반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오태석 부친은 명고수 오수관으로 아버지와 박덕기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낙안읍 근처에 살던 동편제의 대가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학습하였다. 1940년 초반 박귀희와 장월중선에게 가야금 병창을 전수하면서 전승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박귀희는 자신의 가야금 병창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전승방법에서 구전심수(口傳心授)와 교재 활용이 병행될 수 있는 혁신적인 전수방법을 채택한다. 뿐만 아니라 가야금 병창에 대한 자료정리와 수집을 통해 예술적 증빙자료를 확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은 변화와 변질을 최소화하고 고유한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변화와 변질이 최소화된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 호남가는 여러 사람이 모여 합주를 하여도 원형과 유사한 형태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전통적인 구전심수 전승방법과 교재 및 자료수집을 활용한 전수교육은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의 효율적인 계승과 변형을 최소화하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전통적인 전승방법은 대면적 관계를 형성한 사제관계에서 유지되었지만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방식의 구전심수 형태가 교재를 통한 전승방법 활용으로 원형의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근대화된 전수교육체계의 변화를 박귀희제 가야금 병창에서 시도하였고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박선옥 | |
11 | 수건춤 | 춤 | 수건춤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7-01-06 | 59 | 정읍시 | 한국 전통춤 중에서 민간에 뿌리를 두고 연행되었던 수건춤은 액(厄)을 푸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살풀이춤 또는 입춤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추는 수건춤이 아닌 경우에는 살풀이춤 계통으로 분류하기에는 부적절하고 입춤 계열에도 맨손춤, 수건춤, 소고춤 형태가 있기에 수건춤을 대신하는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 수건춤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수건을 들고 추는 춤’을 ‘수건춤’이라고 명명하면서부터 통용화되었다. 수건춤은 1900년대 재인, 광대, 권번의 예기들이 추었던 전통춤의 한 분야이다. 특히 정읍출신 전계문(全桂文: 1872-1940)는 명고수이며 명무(名舞)로 당대 최고의 춤꾼 한성준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성준이 지도로 이주환, 김보남, 김천흥, 한영숙, 강선영에게 전계문의 춤이 전승되기도 한다. 전계문의 춤을 한성준으로부터 전승받은 김보남(金寶男:1912-1964)은 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3기생으로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였고 무용에 재능이 뛰어나 양성소의 박성재, 김천흥과 함께 한성준 무용연구소에서 승무와 고전무용을 학습하였다. 정읍 출신 명무 전계문의 춤사위가 한성준에게 계승되었고 다시 김보남에게 전승되면서 제자 신관철로 재인계열 수건춤이 이어졌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9호 수건춤 보유자 신관철은 1956-1960년 서울에서 김보남에게 정읍 재인 계열의 수건춤을 전수받았다. 수건춤은 권번의 기녀들이 저고리 소매 속에 큰 명주 수건을 감추고 춤을 추다가 수건을 꺼내서 제주를 보여주는 춤사위를 가지고 있다. 수건춤의 다양한 손사위와 몸짓, 발디딤의 모든 춤사위가 정읍의 전계문에서 출발하여 한성준, 김보남으로 이어지는 전승계보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고시 되었다. | 전계문(全桂文: 1872-1940)은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출신으로 전기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무계(巫系)집안 출신으로 주고 정읍지역에서 활동한 명고수(名鼓手)이며 명무(名舞)로 당숙이 명창 전도성이다. 전도성의 수행 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정읍 아양정(峨洋亭)에서 전통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전계문는 북 뿐만 아니라 춤과 정악, 양금, 가야금,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하였고 춤으로는 특히 한량무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한성준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정읍에 내려가 보름 정도 머물며 전계문에게 북가락과 춤사위를 배우기도 하였다. 전도성의 유일한 생존 제자 김원술에 의하면 그가 “1930년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시절 한성준에게서 자신이 전계문의 제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고 한다. 또한 정읍츨신 국회의원과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송연주에 의하면 “한영숙이 생전에 한성준 할아버지가 전계문으로부터 춤을 배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였다.” 고 한다.이와 같은 전통예술들의 회고와 구술에 의하면 정읍에서 활동하던 전계문의 춤사위가 한성준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한성준의 제자 김보남이 신관철에게 전승하는 체계가 형성되었다.정읍출신 전계문의 재인계열 수건춤을 보전하고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9호 신관철 보유자를 지정고시 하였다.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수건춤은 정읍 출신 전계문과 한성준, 김보남으로 전승 계보가 구축된 재인 계열의 춤사위이다.전통춤은 몸 사위만으로 춤추기보다는 다양한 소품을 주로 사용하는데 수건춤을 수건을 소품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흰색 명주 수건을 사용하고 의상은 흰색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쾌자, 허리띠, 망건, 그리고 머리에 흰띠를 두른다.반주음악은 남도 시나위 음악으로 굿거리 96장단과 자진모리 30장단, 다시 굿거리 8장단으로 구성되어있다. 남도 시나위 음악의 특성상 동일한 가락을 연주하기보다는 장단수에 반주음악의 무게를 두고 있다. 소품으로는 흰색 수건을 사용하는데 공연용으로 제작하여 일반 수건춤에서 사용하는 수건보다는 상당히 길게 제작되어 사용되고 있다.전계문에서 한성준, 그리고 이왕직 아악부 출신 김보남으로 전승된 정읍 수건춤은 전승 흔적이 정읍에 남아있지 않아 지역 출신 전승자를 발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울에서 전승되고 있던 전계문 계열의 수건춤이 한성준과 김보남, 그리고 신관철로 계승되는 정읍풍의 수건춤이 전승되고 있다.201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이후 두 차례의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 전계문은 정읍지역에서 활동하던 재인 계열 전통예술가로 정읍권번에서 사범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말기 명창 전동성이 당숙으로 판소리 고법 이외에도 대금, 양금, 거문고, 가야금, 가곡, 에 뛰어났다. 또한 춤꾼으로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정읍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전통예술이 전계문, 정자선으로 계승되었지만, 해방 이후 정자선의 재인계열 춤은 아들 정형인을 통해 전승되었다. 그러나 전계문 계열의 전통춤은 정읍지역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서울의 한성준을 중심으로 전계문의 수건춤이 남아있었고 이를 김보남을 통해 신관철이 계승 할 수 있게 되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민속무용 일부가 남아있게 되어 문화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현재 수건춤 보유자 신관철이 정읍지역에서 전계문의 재인계열 민간 춤을 계승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전수생이 정읍에서 전수교육을 받고 있다. | 신관철 | |
12 | 진안중평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20-06-05 | 7 | 진안군 | 농경문화의 발달로 농악이 형성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유래를 밝히기에는 문헌적 자료가 미흡하다. 이러한 역사적 선상에 중평농악이 놓여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증빙자료는 1998년 청주 소고리 볍씨의 발굴로 농경문화가 1.600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농경문화를 기준점으로 시간을 환산해보면 농악은 최소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예술이다. 또한 오랜 시간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소중한 무형유산이다. 전통사회에서 농경문화로 다양한 지역에 농악대가 설립되었고 서민문화를 대표하는 무형자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진안 중평농악은 진안, 장수, 금산 등 전라북도 동북부 지역의 전라좌도 농악에 속한다. 지역적으로는 전라좌도 농악에 속하지만 진안 중평농악이 언제부터 발생되었는지 명확한 증거자료는 부족하다. 하지만 최근 자료인 1967년 『호남농악 조사보고서』 에 의하면 진안 좌도 농악의 상쇠 한규동이 “13세 때 진안 굿패를 따라 다녔다.” 는 내용을 살펴보면 1910년 이전에도 진안지역의 농악이 전승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진안중평농악이다. 전라북도 진안지역 농악에는 한규동 이외에도 뛰어난 예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남원, 임실, 전주 등지에서 연행을 하였고 해방 이후 진안농악은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전라북도 대표팀으로 참여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농악 명인들의 고령화와 6·25 전쟁,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전국농악경연대회가 중단되고 지역적 교류가 축소되면서 농악 명인들은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농악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소규모 형태의 농악대는 지역을 기반으로 포장 걸립, 다리 걸립에 참여하면서 좌도농악의 명맥을 유지한다. 진안농악에도 뛰어난 명인들이 많았고 진안은 물론 무주·장수·금산 등 인근지역까지 연행을 다니면서 명성을 얻었다.진안농악 명인들의 뛰어난 예술적 영향은 마을 단위 농악인들에게 예술적 영향을 미쳤고 붙박이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전문적인 걸립농악단과 마을 단위 농악대가 예술적 교류를 통해 성장, 발전하는 모습이다. 1998년 진안 백운면 출신의 조병호가 전라북도 무형문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지만, 사망으로 지정 해지되고 이후 전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진안중평농악이 2020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어 전승 명맥을 계승하고 있다. | 진안 중평농악은 호남 좌도 농악의 한 분류이다. 좌도라는 용어는 전라도 동북부 신간지대로 북부지역은 금산·장수·진안이 해당되고 중부지역은 전주·임실·순창·남원·곡성·구례, 그리고 남부지역으로는 화순·고흥이 속한다.호남 좌도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좌도농악 분포지역에서도 전승계보에 따라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 진안 중평농악이다.진안 중평농악은 진안군 성수면 중평마을 상쇠 김봉렬(金鳳烈,1914∼1995)을 중심으로 전승되었고 출중한 기량으로 중평농악을 계승 발전시켰다.진안 중평농악 계승자 김봉렬은 중평마을 출신으로 진안군 김인철에게 2년간 농악을 학습하였고 진안군 마령에 살던 상쇠 하정수(하바우) 문하에서 중쇠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25세부터 중평마을 농악 상쇠를 맡아 다양한 걸궁에 참여하여 호남 좌도 중평농악의 전승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진안 중평농악은 진안지역 농악 명인들의 명맥을 잇고 전승체계와 북부산간지역 마을 농악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걸립농악과 마을 농악이 공존하였던 전통은 근대 사회로의 전환과 문화변동으로 인하여 걸립농악대의 모습은 퇴화되었다.진안 중평농악 풍물굿은 판굿 형태로 마당밟이(지신밟기)와 걸궁굿(걸립굿), 파접례, 장원예 로 구성되어있고 마지막 순서는 마을 사람 모두가 대동굿을 하면서 늦은 밤까지 연행을 한다. | 진안 중평농악은 마을 두레굿으로 1960년대까지 걸립굿과 마을굿 형태로 전승되어왔다. 진안군 진안읍에서 출생하여 중평농악을 전수해 오던 김봉렬은 마을 두레굿을 계승하고 있었다. 김봉렬이 전승해오던 진안 중평농악은 다른 지역 농악가락과 혼재되지 않고 투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장단으로 인정받고 있다.증평굿은 크게 마당판굿, 마당밟이, 걸립굿으로 구분된다. 마당판굿은 싸움과 놀이형식의 굿으로 인간사회 갈등과 삶의 모습을 굿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서 액을 몰아내고 수명장수와 축원을 기원하는 굿이다. 따라서 마을의 당산굿, 큰샘굿, 다리굿을 하고 성주굿, 좌옹굿, 장왕굿, 노점굿, 샘굿이 포함된다. 걸궁(걸립굿)은 다른 지역으로 재화(財貨)를 취득하러 가는 굿이다.치복(농악복)은 군악의 영향을 받아 군졸 옷차림과 유사하다. 흰색 저고리에 검정색 또는 파란색 더그레를 입고 상쇠는 검은색 더그레와 삼색 드립을 등에 달았다. 오늘날에는 흰색 바지저고리나 여러 가지 색의 더그레를 입고 삼색 띠를 두른다. 왼쪽 어깨에 파란 띠를 오른쪽 어깨에 빨간색을 두르고 허리는 노란색을 맨다.상모는 악기 치배 모두가 쓰는데, 쇠, 장구, 징은 부들 상모를 쓰고 소고는 채상을 쓴다. 깃발은 숫기(旗)인 설명기(說明旗)와 암기(旗)인 용대기(龍大旗) 그리고 농기(農器), 영기(令旗)를 사용한다. 설명기는 전통사회에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옆에 농악 단체의 이름을 기록하였지만, 현재는 농악단을 대표하는 단체 이름을 쓰고 농기는 따로 만들어 사용한다. 용대기는 용담(龍潭)에 잠겨있는 잠용(潛龍)을 형상화하고 연못에 있는 잉어, 붕어, 자라, 거북이가 풀 속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는다. 용기는 두레 농악의 상징이고 1년 12달 24절기를 담고 있다.설명기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과 신농유업(神農遺業) 두 가지를 사용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신농유업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탄압하였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는 자연스럽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만 사용하고 있다. 전통 방식으로는 신농유업도 병행 사용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영기는 농기와 마찬가지로 풍물과 두레의 상징이다. 두레가 났을 때 농기 옆에 설치하고 좌령과 우령으로 꽂아놓는다. 삼각형 모양의 영기는 관가의 행렬에 쓰이고 민속놀이에서는 사각형 영기를 사용한다.앞치배에는 나발 1명, 쇠 1-4명, 징 1-4명, 장구 1-9명, 북 1-4명, 소고 1-12명 구성하지만, 최소 각각 1명으로도 치배를 구성할 수 있다. 잡색은 어정잽이라고 하며 뒷치배에 해당한다. 굿판에서 어정거리는 모습을 의성화 한 것이다. 포수, 양반, 조리중, 각시로 편성한다.진안 중평굿 가락 짜임새는 마당판굿에서는 어르기(어름굿)-두마치-문굿(넘는 가락, 두마치)-어르기(잦은 열두마치)-외마치(두마치)-세마치-사오륙마치(넘은 가락, 두마치)-일곱마치(일곱마치 뒷가락, 넘는 가락, 두마치)-여덟마치(여덟마치 뒷가락, 넘은 가락, 두마치)-아홉마치 (아홉마치 뒷가락,넘는가락, 두마치)-어르기-품앗이 굿-느린 삼채굿(외마치, 두마치)-어르기-호호굿(호호굿 도드래미)-각정굿 내드림(작성굿, 두마치)-어르기 노랫굿초다듬이(노래굿, 두마치)-오르기-홑영산(정영산, 영산다드래기, 두마치)-어르기-춤굿(외미치, 두마치)-어르기-반잔지래기(외마치, 두마치), 어르기-반잔지래기(외마치, 두마치)-어르기-왼잔지래기(영산다드래기, 두마치)-어르기-반잔지래기(외미치, 두마치)-어르기-왼잔지래기(영산다드래기, 두마치)-어르기-파당굿(넘는가락, 두마치)로 진행된다.마당밟기(지신밟기)는 당산굿-샘굿-성주굿(액풀이굿)-장광굿(칠룡굿)-광굿(노적굿)-다리굿-술굿으로 진행된다.걸립굿은 들당산굿-날당산굿- 망월굿-술맥이굿-두레굿으로 가락이 짜여있다.전통사회에서는 지역마다 마을굿을 연행하는 전라 좌도농악 명인들이 존재하였지만 대부분 사망하거나 단절되었고 오늘날 김봉렬을 중심으로 계승된 전라좌도 중평농악이 전승되고 있다.전라 좌도농악의 초대 전승자를 기술하면 김인철(쇠, 잔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주천마을)을 출발점으로 기술할 수 있다.2020년 6월 5일 지정 고시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8호 진안 중평농악은 전라 좌도 중평굿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수 활동을 하고 있으며 보유자없는 단체지정종목이다.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보유단체로 지정고시된 시점을 기준으로 3년이 경과 한 이후 보유단체 회장의 추천으로 전수 기간 3년 이상 전수생에게 이수자 응시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진안 중평농악보존회는 지정고시 이후 3년이 경과하지 않아 이수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현재 진안 중평농악보존회 이승철 회장을 중심으로 전수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 진안 중평굿은 호남 좌도굿에서 파생된 형태이지만 연행방식과 가락 구성에서 차별화를 이루고 있다.첫째 품앗이 굿에서 늦은 삼채 중 호호굿 이후 각성굿으로 진행될 때와 가락이 서로 연결되어 넘어갈 때를 빼고는 모두 어름굿으로 시작한다.둘째 농악 가락은 느린 가락에서 빠른 가락으로 이어져 가장 빠른 두마치로 맺는다. 여기서 두마치로 끝나는 것은 좌도 풍물굿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뒷소리 부분에 해당한다.셋째 일명 소쩍새 가락이라고 하는 영산은 영산 신에게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려줌으로써 풍년을 기원하는 풍농(豐農) 기원 의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열두마치와 호호굿에서 출연하는 섞인 박자는 정화의식을 뜻하는 것이고 영(靈)을 받는 청신의식에 쓰이는 어름굿과 함께 판굿에 있어서 제의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넷째 진안 중평굿은 어름굿에서 시작되어 잦은 열두마치의 마치굿(세마치, 사오육 마치, 일곱마치, 여덟마치, 아홉마치), 품앗이굿, 호호굿까지 제의적인 뜻을 지니기 때문에 앞뒤순서를 바꾸거나 가락을 덜어내지 않고 정형화된 가락을 연행한다. 그러나 뒷굿에서는 농악판의 흐름에 따라 순서를 바꾸어 치기도 한다.다섯째 태평소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다른 지역 농악의 영향을 받아 태평소가 첨가되었다.진안 중평농악은 뛰어난 뜬쇠들이 많았고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까지 걸궁을 나갈 정도로 예술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예인들의 고령화, 경제적 압박으로 농악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전통농악의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 계승자들에 의해 진안 중평농악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보유단체를 중심으로 전통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이승철 | |
13 | 익산 성당포 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9-06-07 | 7 | 익산시 | 농악은 농촌에서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노동을 할 때 연행하는 음악이다. 넓은 의미로는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행진·의식·노동·판놀음 등을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金鼓)·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농악 장단은 타악기인 꽹과리 리듬이 핵심을 이루고, 호적 선율은 농악가락을 돕는 데에 그친다. 농악은 지역마다 고유의 특징을 갖는 형식으로 발달해 왔으며, 지역적 특징에 따라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나뉜다. 농악을 공연하는 목적·계기·방법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이 있고, 그 밖에 기우제굿·배굿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익산 성당포 마을은 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성당포 농악은 조선 효종 9년 (1658년) 성당창이라는 조창(漕倉)이 성당포에 설치되면서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전승이 단절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역사적 고증 자료에 의하면 성당포 조창이 설치된 1658년 성당창에서는 성당포 별신제가 해마다 성대하게 연행되었는데 풍물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성당포 농악은 지리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인접하고 있어 호남우도, 좌도, 충청도의 웃다리 농악이 혼재되어 있는 문화완충지역에서 발전하였다. 현재 전라도의 우도와 좌도, 충청도의 웃다리 농악이 혼합되어 전승되고 있는 농악은 성당포 농악이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발견되고 있다. 성당포 농악에 참여하였던 이인수가 생존하여 성당포 농악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전라북도지역에 포구 농악 형태로 남아있는 무형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하였다. 현재 이인수가 2022년 9월 사망하여 성당포농악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 성당포 마을은 전라북도 익산시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 중하류지역의 성당면 성당리에 위치한 포구(浦口)마을이다. 위쪽에는 강경포구가 위치하고 아래쪽 금강가에는 웅포 즉 ‘곰개’ 가 자리 잡고 있다.예로부터 금강의 수로 교통이 발달하였고 마을 뒤쪽으로는 호남평야를 두고 있어 일찍부터 금강 일대는 물산(物産)의 집산지로서 포구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따라서 포구발달과 호남평야의 곡창지대, 강경, 웅포, 군산, 서해로 이어지는 수로(水路)길로 인하여 성당포 마을에는 조선시대 나라의 세곡(稅穀)을 모아 보관하는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무주, 진안, 장수지역 세곡이 금강 물줄기를 따라 성당포로 운반되어 조창에 집하되어 금강 뱃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송되었다.성당포 지역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호남평야 지역의 호남우도농악 영향을 받았으며 수로길을 통해 충청지역 웃다리 농악과 빈번한 인적 교류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수로길을 통한 문화교류는 매우 독특한 성당포 농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현지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호남우도농악 지역에 속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호남좌도 농악과 음악적으로 긴말한 영향권 안에 있다고 밝혀졌다.결국 성당포 지역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호남우도 농악과 충청지역 웃다리 농악, 호남좌도 농악이 결합된 혼합형 농악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성당포 농악은 지리적·문화적 배경으로 인하여 성당포 순풍당 당제와 당산제, 무제, 기우제 그리고 해방 이후 성당포 마을 뒷산 유당산과 용문산 일대에서 펼쳐지던 농악축제를 기반으로 오늘날 성당포 농악이 형성되었다.성당포 지역 농악 유래는 효종 9년(1658년) 대동법(大同法) 실시로 성당포에 5개 조창이 건설된 시기를 기준으로 산정해보면 대략 3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 성당포 농악은 전라도 동북부 지역인 무주·진안·장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라좌도 농악의 기본 골격 구조를 두고 있다. 호남평야 지역의 호남우도농악의 영향과 금강 수로길을 매개로 인접한 충청남도 웃다리농악의 유입으로 독창적인 문화 완충형 농악으로 재창조되었다.이는 성당포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문화 완충지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이러한 혼재된 예술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유실(遺失)되어 보존의 가치가 매우 높다.호남좌도 농악의 영향으로 농악가락에 ‘마치’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복색도 호남좌도 동북부 지역의 복색과 거의 흡사하다.호남좌도 농악의 기본 골격에 호남우도 농악의 ‘양산도 가락’을 삽입하였고 좌도 농악에서 볼 수 없는 굿가락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장단의 시김새가 호남우도 농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장구가락은 호남우도 농악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장단 분화가 세분화되어있다. 뿐 만 아니라 금강 수로길로 인하여 충청남도 웃다리 농악의 ‘쩍쩍이 가락’, ‘길군악 칠채’, ‘육채’ 등 굿가락 영향도 성당포 농악에 쓰며들어 있다.호남좌도 농악, 호남우도 농악, 웃다리 농악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농악문화를 형성하였고 오랜 시간 보존하고 있어 문화 완충지역의 특색을 잘 계승하고 있어 전통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성과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다만 조창이 있던 성당포는 가와집이 많을 정도로 경제적 풍요와 인적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농촌인구의 감소, 고령화,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현실을 직시하면 전승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무형적 가치가 우수한 종목을 발굴하여 문화재 종목으로 지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지정된 종목의 전승 환경을 개선 시키는 것도 병행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 임승룡 | ||
14 | 전주 기접놀이 | 놀이 | 굿놀이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8-03-02 | 63 | 전주시 | 전주기접놀이는 전주부의 우림면과 난전면 그리고 우전면 (지금의 삼천동, 평화동일대)에서 1940년대부터 연행되었던 민속놀이이다. 해방 이후 난전면의 12개 마을 주민들이 칠월 칠석 술메기굿과 합굿, 기접놀이를 연행하였고 1956년 중평마을에서 기접놀이가 개최되어 인근 11개 마을이 참여할 정도로 성대한 민속행사였다. 이후 지역민들의 참여 부족으로 단절되었다가 1997년 삼천동 계룡리 일대(비아, 정도, 용산, 함대)를 중심으로 기접놀이 보존회가 결성되어 전승이 유지되고 있다. 전주 기접놀이는 전주 우전과 난전 지역에서 전개되어온 합굿매기의 한 과정인 용기놀이의 다른 이름이다. 합굿매기는 칠월 백중 술메기 때 여러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을 풍물패과 함께 어우러지는 전통놀이 문화이다. 『중요민속자료조사보고서』에는 난전들의 중심 마을인 중평마을 기(旗)가 1952년 중수되었고 이전 사용하던 기(旗)는 1895년 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전승지역에서 확인된 석구리 용기(龍旗)는 1925년 제작되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기접놀이 상쇠 고(故) 심동섭(1921)의 구술에 의하면 “합굿매기와 용기놀이를 어릴 때 보았고 200년 이상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고 한다. 1997년 기접놀이 보존회를 통해 전주기접놀이가 재현될 수 있었던 계기는 일제 강점기 시절 합굿연행에 참여하였던 연희자들이 생존하였고 심동성을 비롯하여 징에 최원오, 홍기섭, 이용배, 장고 송수철, 용기놀이에 박병두 같은 실연자들이 기접놀이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즉 역사성과 실연 가능한 전승 형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전승 참여자들이 생존하였으며 실연을 통한 원형과 전형을 유지될 수 있었다. 지역민들의 참여의지와 전승의지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 전주기접놀이가 지정되었다. | 전주기접놀이는 현재 평화동, 삼천동 일대의 각 마을에서 성행하였던 민속놀이로 칠월 칠석이나 백중날(음력7월 15일)을 맞아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묵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연희형태이다. 과거 기접놀이는 전주시 평화동, 효자동 지역의 여러 마을이 참여하던 용기놀이의 일종이었다.195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전의 완주군 난전면(亂田面, 지금의 전주시 평화동)과 우림곡면(雨林谷面, 지금의 전주시 평화동)이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특히 난전면의 여러 마을에서는 기접놀이가 크게 성행하였는데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기접놀이는 난전면 중평마을을 중심으로 문정(文亭), 신기(新基), 석구(石九), 용와(龍臥), 부평(富坪), 장교(長橋), 산정(山亭), 흑석(黑石), 학전(鶴田), 대정(大亭)마을 등 12개 마을 주민들이 칠석이나 백중날을 맞아 12개 마을 중 한 마을의 초청에 의하여 조선 중엽부터 성행하던 민속놀이축제였다. 당시 난전면의 28개 마을 중 12개 마을이 행사에 참여할 정도로 성대하게 진행되었고 이후 우림곡면의 비아, 함대, 정동, 용산 마을로 확산되었다.1956년 중평마을 용기(龍旗) 제작 회갑년 기념 전주기접놀이 행사는 17개 마을과 당시 삼천동 5개 마을이 참여할 정도로 지역민들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지역민들의 단합된 모습은 농촌사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력 확보와 협동정신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을 공동의 행사로 모아진 기금으로는 공동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접놀이는 연희이 형식이지만, 농촌사회에서 필요한 두레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이후 일제 강점기에 잠시 기접놀이가 탄압에 의해 시행되지 못하였고 1974년 제16회 풍남제 행사에서 전주농고 농악대와 현지 주민 50여명이 출연하여 재현되었다. 재현(再現)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기접놀이에 참여하였던 연행자들이 생존하였고 연행방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기접놀이는 4마당으로 구성되어 전승되고 있다. 첫째마당은 각 마을의 회의가 진행되고 둘째마당은 경연마당으로 진행된다. 셋째 마당은 대동마당으로 각 마을 주민들이 농사일을 통해 묵었던 감정을 화합의 마당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마지막 전송마당은 각 마을 단위로 참여한 용기를 전송하는 것이다.오늘날에는 전주기접놀이보존회가 설립되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 지접놀이를 계승하고 있고 기접놀이 전수관이 삼천동에 건립되어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 기접놀이는 먼저 놀이 주최를 담당하는 마을이 정해지면 칠석이나 백중날 참여마을을 초청한다. 초청마을 입구 오른쪽에 영기를 꽂아두면 전령이 가지고 간 영기(令旗)와 교체한다. 참여를 희망하지 않는 마을은 입구 쪽 양쪽에 영기(令旗)를 꽂아두면 된다.기재사(旗才士)들은 용기놀이를 하는데 기 펼치기, 기 높이 들기, 기 내려깔기 등으로 용기놀이를 진행하고 초청된 마을의 용기가 농악대 속으로 뛰어나와 기 부딪치기 놀이를 진행한다. 이때 깃봉이 부러지거나 빠지면 기 제작 년도를 놀이 날짜로 바꾸어 취급하여 참가 마을 중 맨 끝에 위치된다. 이처럼 용기놀이로 승리한 마을에게 인사하고 인사굿을 친다. 합굿놀이로 각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고 참가 마을 주민들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면 전송굿으로 마무리 한다.전통사회에서는 기접놀이가 짧게는 3일, 길게는 7일 동안 거행되었고 마을 앞에 위치한 당천(堂川)에서 진행되었다.기접놀이 전승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①각 마을 초청 ②풍장패 행렬 ③전령의 행사일정 고시 ④용기 경주 ⑤용기 맞이굿 ⑥기세배 ⑦풍장경연 ⑧합세합굿 ⑨용기 기수의 개인놀이 ⑩기 부딪치기 ⑪각 마을이 연희 ⑫참여마을 용기 전송굿 순서로 기접놀이가 진행된다.오늘날 가장 오래된 용기는 전주시 평화동 중평마을 용기로 1895년(고종 32년) 8월 15일에 제작되었다. 당시 마을의 상좌 박성숙(朴成淑)과 공원(公員) 윤공녀(尹公汝)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용 그림은 1936년 벽곡(碧谷)이 다시 그렸다고 한다.맛내골 용기는 1898년(고종 35년) 7월 15일 제작되었고 원석구 마을의 용기는 1925년 10월 10일 제작되었으면 삼천동의 비아, 함대, 용안, 정동 마을의 용기도 1941년 제작되었다.기접놀이에 사용되는 용기는 폭 3m, 길이 4.7m로 흰색 무명천에 용(龍)이 그려져 있으며 기의 접촉 부분에 제작연월일이 기록되어 있다. 기에 용, 거북이, 물고기 그림은 용신(龍神)과 기우(祈雨)를 상징하는 것으로 마을에 가뭄이나 재앙이 있을 때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용기를 꽂아놓는 풍습이었다.전주기접놀이는 들녘에서 연행되는 놀이문화였고 각 마을이 참여하기 때문에 참가인력도 많았다. 또한 용기놀이는 넓은 들판이나 당천(堂川)에서 거행되었기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극장문화 발달로 무대용 용기가 따로 제작되어 시연되기도 한다.전주기접놀이의 전승체계는 일제 강점기 탄압에 의해 전승명맥이 단절되었으나 1976년 제 16회 풍남제 행사를 시작으로 연행에 참여하였던 지역민들의 실연과 구술에 의해 복원되었다.초기 합굿 전승자로는 1998년 전주기접놀이보존회 창립에 참여하였던 1세대로 이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합굿에 참여한 연행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연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복원에 참여하기도 한다. 1세대로 지칭하는 참여자들은 대부분 1920-1930년 출생으로 당시에도 60-70대 이상의 고령이었다.용기놀이는 박병두 심영배, 김정열, 박세영, 유석용, 최선규에게 전승되었고 신성민이 기예부분을 체계화시켜 오늘날 전승되고 있다.2016년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전라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201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었다.201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단체종목으로 지정되어 전수 교육기간 3년이 경과하였지만 이수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 전주 기접놀이는 평화동, 삼천동 일대의 각 마을에서 성행된 민속놀이로서 7월 칠석, 백중날을 맞아 풍년을 기원하고 이웃 마을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묵었던 감정을 풀어내기 위한 전북지방의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조선시대부터 연행되었던 민속놀이로 난전면의 12개 마을이 참여하였고 오늘날 정도, 비아, 함태, 용산 4개 마을로 확산되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민속예술이다.전주기접놀이는 연행 방식에서 예술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각 마을의 연행형태가 화합을 위한 공동참여 형식으로 진행한다. 영기를 활용한 초청방식과 참여방법이 독특하고 마을별 공동사업을 위한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농업사회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협동정신과 갈등해소 기능을 놀이로서 해소하는 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특히 기접놀이에 등장하는 표현방식과 놀이방법, 예술적 요소가 결합된 민속예술기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기접놀이가 농업사회에서 형성된 연희로 농촌의 도시화로 전문적인 전승체계가 형성되어야 할 당면과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농촌사회의 고령화와 현대화, 젊은 청년세대의 유입 등 당면과제가 해결되어야 지속적인 전승체계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전주기접놀이 핵심 연행 과정 중 용기 춤은 힘과 기술을 요구하는 춤사위로 전승자 양성이 매우 시급한 부분이다.조선후기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전주기접놀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역민들의 참여로 발전·유지되었지만, 현대산업화 사회에서 어떻게 원형을 유지하면서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남겨두게 한다. | 심영배 | |
15 | 고창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00-07-07 | 7 | 고창군 | 전통국악의 끊임없는 변화는 연주자들의 요구와 제작자들의 경험과 기술, 그 시대에 작곡되어지는 새로운 연주곡, 새로운 연주법, 연주 장소 등 여러 가지 요인들과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진다. 시대변화에 따라서 다양하게 개량되기도 하며, 도구의 발달로 제작공정이 보다 쉬워지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악기제작의 근본 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악기장의 연주자에 대한 배려, 악기에서 가장 중요한 소리와 관련된 감각기술,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온 가치관이다. 고수환 악기장은 모든 과정을 가급적 “편리한 방식”을 지양하고 “옛 방식”을 고집한다. 물론 일부 나무를 제재하는 과정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지만 그 외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수작업을 고집한다. | 2014-11-28 | 고창의 농악 명인들은 고창농악의 뿌리를 영무장농악에서 찾는다. 영무장노악의 영무장은 영광과 무장을 통칭해 두 지역이 동일문화권임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영무장으로 통합되는 권역은 좁은 의미에서의 영광과 무장이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두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장성, 함평 등지를 포괄하는 광역적인 명칭이다. 고창농악은 여무장지역의 권역적 특징을 공유했던 전통이 행정구역의 개편과 무형문화재 지정의과정에서 개별 지역단위 풍물굿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광농악은 마지막 세습무계 예인이었던 전경환, 김오채 선생이 198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존회를 결성했고, 고창농악은 세습무계 예인들이 사라진 후 그들의 예능을 전수받은 사람들이1985년에 고창농악단을 결성하고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현재 고창농악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는 고창농악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 황규언 상쇠의 농악이다. 그러나 황규언 선생의 농악이 개인농악아라기보다는 마을농악과 세습무계집단의 농악이 결합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규언 선생이 성송면 하고리 양사동 마을에서 농악연행을 시작했지만, 박성근이나 김만식(본명 김만석) 등의 예인들을 초청해서 가락을 배우고 그들과 같이 걸궁패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치배 편성기수, 나발, 새납, 잡색으로 구성된다.기수: 영기 2, 농기 1, 단기 1나발과 새납앞치배: 쇠, 징, 장고, 북, 소고(채상소고)잡색: 대포수, 영감(양반), 망구(할미광대), 참봉, 각시(각시광대), 중광대, 조리중, 창부(좌창, 우창), 비리쇠(방울쇠, 말뚝쇠), 홍적삼, 동방치마 아가씨, 무동, 농구, 장화 | ◎ 전승내용고창지역에 전승되는 농악은 정월 당산제 기간과 여름 농사철에 집중되어 있다.정월 당산제 기간에는 문굿,당산굿,샘굿, 줄굿과 줄다리기,판굿 등이 연행되는데,각각 낱개로 연행되지 않고하나의 묶음으로 결합되어 있다. 당산제를 주로 보름에 진행하기 때문에 이들을 통틀어 보름굿이라고도 한다. 여름 농사철에는 대부분의 마을에서논매기를 마치면서 풍장굿을 친다. 정월과 여름철에 농악 연행이 집중되어 있지만,유두나 칠석, 백중,추석 등등의 세시절기에도 농악을 치고 놀았다. 이렇게 세시적으로 연행되는 형태 외에도 주술적 치료를 목적으로 한주당매기 등이 연행되고 있다.고창농악보존회에서 전승하는 농악이 황규언 선생의 예능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개인농악은 아니다. 처음 고창농악단을 창설할 당시고창지역의 각 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농악 연행자들이 결합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농악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의견수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전승이 중단된 문굿과 풍장굿, 도둑잽이굿 등의 경우 보존회 원로회원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재현 공연을 했다.문굿계보 고창농악의 문굿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걸궁패가 걸궁을 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 갈 때 마을 입구에서 치는 문굿이고, 다른 하나는 매굿(마당밟이)을 할 때 집 대문 앞에서 치는 물굿이다. 당산굿계보 당산제의 경우 유교식 제사와 풍물굿이 결합되기도 하고, 풍물굿으로만 진행하기도 한다. 이때 당산 앞에서 치는 굿을 당산굿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당산제를 지내는 정월의 마을굿 기간에연행되지만, 정월에만 연행되는 것은 아니다. 여름철에 논매기를 하면서 치는 풍장굿과 술 먹고 놀 때 치는 술멕이굿을 할 때도 당산굿을 친다.샘굿계보 당산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공간이 반면, 샘은 식수원으로서 기능이 중시된다. 일반적으로 당산굿을 먼저 치고 다음으로 샘굿을 치는 경우가 많다. 또 샘굿은 마당밟이 과정에서 연행되기도 한다. 샘이 개인 집안에 있는 경우 마당밟이 과정에서 샘굿을 치기 때문이다. 마을 공동의 샘과 개인 가정의 샘이 사용자의 범위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제의 절차는 같다.줄굿과 줄다리기계보 줄다리기는 독립적인 하나의 세시풍속이기도 하지만, 마을 단위의 공동신앙인 동제와 함께 놀아진 예가 많다. 고창지역의 줄다리기는 줄을 만들어서 줄굿을 치고, 편을갈라서 줄다리기를 한 다음 줄을 들고 온 마을을 도는 오방돌기를 한다. 오방돌기를 마치면 당산에 줄을 감아놓고 당산제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줄굿은 줄다리기 줄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치는 굿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줄다리기- 오방돌기- 줄 감기의 과정을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매굿계보 고창지역에서는 마당밟이를 매굿이라고 한다. 매굿은 마을의당산제와 당산굿 전후에 각각의가정을 돌면서 진행된다. 마을의 모든 가정집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저녁 늦게까지 매굿을했다. 마당밟이를 통해 마을 기금을 장만하고 당산제 준비늘 했기 때문에 한 집도 빠뜨릴 수 없었다.◎전승계보고창농악은 세습무계집단의 연행활동과 그들의 예능을 전승한 농악예인들에 의해서 정립된 것이다. 1890년대이전에 출생한 최화집, 김학준, 강성옥의 시대와 1900년대 직후에 출생한 박성근,전경환, 김오채의 시대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들의 활동은 고창이나 영광, 장성 등의 지역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창을 중심으로 연행한 인물이 바로 박성근과 황규언이다.1985년 고창에서 농악단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고창읍의 오거리 당산제와 관련된다. 고창의 당산제를 거행하는데 풍물굿을 연행하는 치배들이 정읍 사람들인 것에 걱정을 하던 군수가 문화원장과 상의를 한 끝에 농악단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문화원장의 지휘하에 고창군의 전역에서 풍물굿을 연행할 줄 아는 사람을 집합시켰다. 이 때 모인 사람이500여명에 달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과거 박성근 일행과 함께 연행했던 사람은 황규언, 강대륙, 장대홍 등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실내체육관에 모아놓고 각자 실력을 점검하여 23명의 정예멤버를 선정했다. 선정된 23명은 문화원장의 주도하에 4년동안 집단 연습을 했다. 이때 상쇠는 황규언 선생이 맡는다. 황규언 선생은 과거 김만식 선생으로부터 장구가락을 전수받고, 박성근 선생으로부터 쇠가락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결성괸 것이 고창문화원 산하의 고창농악대다.황규언은 1920년 1월 20일 고창군 대산면 덕천리에서 출생하여 9세 때 성송면 하고리 양사동으로 이사를 왔다. 동네에서 15세 때부터 동네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굿을 치기 시작했으며 풍장굿이나 보름굿때 소고나 장구를 치면서 촉 받으면서 풍물을 익혔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활동을 한 것은 20세 때다. 당시 박성근,김만식패가 마을로 문굿을 치러들어왔다. 이들의 연행에 매료되어 걸궁패에 합류하면서 끝장구로 활동하게 된다. 걸궁패 활동을 하면서 박성근의 쇠가락과 김만식의 장구가락을 익히게 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장구치배로 활동하면서 장구가락을 익혔지만, 마을의 상쇠를 겸하게 되면서 박성근의쇠가락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그 후 1980년 대 초반 김만식이 작고하면서 그동안 같이 걸궁패 활동을 했던 전경환과 함께 주로 영광에서 풍물굿 연행을 하게 된다. 황규언이 대회적인 활동에서 상쇠를 하기 시작한 시기는 60세 때부터다. 장구를 치다가 상쇠를 맡게 되었지만,마을에서 상쇠를 했고 박성근패에서 장구잽이로 활동하면서 쇠가락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상쇠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 전통국악의 끊임없는 변화는 연주자들의 요구와 제작자들의 경험과 기술, 그 시대에 작곡되어지는 새로운 연주곡, 새로운 연주법, 연주 장소 등 여러 가지 요인들과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진다. 시대변화에 따라서 다양하게 개량되기도 하며, 도구의 발달로 제작공정이 보다 쉬워지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악기제작의 근본 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악기장의 연주자에 대한 배려, 악기에서 가장 중요한 소리와 관련된 감각기술,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온 가치관이다. 고수환 악기장은 모든 과정을 가급적 “편리한 방식”을 지양하고 “옛 방식”을 고집한다. 물론 일부 나무를 제재하는 과정에서는 기계를 사용하지만 그 외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수작업을 고집한다. | |
16 |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 | 의례 |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07-07-27 | 37 | 고창군 | 오거리당산제는 전국에서 유일한 가족 당산 형태로 된 마을의 풍수지리적인 무형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을 연합굿이 중단된 채로 각 마을의 간소화된 당산제만이 남아 그 맥을 유지하였다. 이를 복원·계승하기 위해 1981년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가 결성되었다. 오거리당산제를 지역주민에게 널리 알리고 후세들에게 전승하기 위한 복원작업과 공연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오거리당산제는 마을굿의 맥락과는 다른 공연작품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오거리당산제는 제의를 주요 축으로 하여 일과 놀이가 결합되는 행위의 집합으로, 전통적인 의례행위와 놀이 행위가 풍부하다. 제관 선출·금기·유교식 제사에서는 일련의 제사 행위가 포함되어 있고, 줄다리기의 ‘줄예맞이’에서는 비록 간소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혼례 행위를 찾아볼 수 있다. 놀이의 면에서는 풍물굿, 연등놀이, 줄다리기 등이 포함되어 풍부한 전통 놀이 행위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고창의 마을이 연합해 중앙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굿으로 공동체성을 찾는데 의미가 있다. 보존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회원들은 마을 연합굿으로서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 각각 소품을 제작하고 역할들을 분담하여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렇듯 회원들의 적극성과 결속력이 오거리 당산제 보전의 원동력이다. 현재 보존회 회원들의 고령화와 인력감소로 전승인력의 감소가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존회에서는 귀농귀촌하는 젊은 지역주민들을 유입하고 연계하여 전승인력 기반을 확보하는 등 보호방책을 마련하고 있다. |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는 고창읍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창 오거리당산제를 주관하는 단체이다. 고창 오거리당산은 고창읍의 고을 풍수가 행주형국으로서 파도를 타고 있는 출렁이는 배의 모습이 되고 있어 고을의 풍토가 요동이 있고 안정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역의 선인들은 고을의 풍수학적인 허를 메꾸기 위해 지역의 5방에 자연 입석신체(立石神體)인 당산을 세워 오랜 옛날부터 고을의 수호신적인 신체(神體)로 여겨온 화표이다. 조선 후기 정조 년간(1790년대)에 전라도 일대에 큰 수해로 인해 고창읍의 지대가 낮은 침수지역의 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전염병으로 환역의 고난을 겪게 되었다. 1803년에 고을의 화주(化主)를 자청한 아전들이 지역의 허한 수구막을 막기 위해 잦은 침수 지역인 중앙과 중거리 그리고 하거리에 기존의 자연입석신체의 당산을 대체하여 더 높고 큰 인공신체인 미륵석주의 신체인 당산을 모신 것이다. 고창오거리 당산은 당집이 없고 상거리와 교촌은 자연신체 입석당산으로 세워져 있으며, 중앙과 중거리·하거리 당산은 인공신체로 잘 다듬어진 삿갓 당산으로서 당의 표시로 탑신형의 화강석 화표가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형상화시키는 등 음양에 맞게 배치되어 민속공예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마을신앙의 표적으로서의 의미가 있고, 전국에서 유일한 가족 당산 형태로 된 고을의 풍수적인 집단 신앙적 화표로서 더욱 유명하다.고창오거리당산제는 전라도 평야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당산제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마을이 아니라 상거리(동부, 천북동), 중거리(남부, 중앙동), 하거리(서부, 신흥동), 교촌동(북부), 중앙동(중앙)의 마을들이 함께 연합하는 마을굿이다. 매년 음력 정초에 각 마을별로 마을굿을 지낸 후, 정월 보름에 각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줄다리기와 연등놀이 등을 하는 당산제이다. | ◎ 전승내용고창 오거리당산제는 설날부터 시작되어 정월대보름에 마감한다. 정월 초하루 자정의 거리당산제로 시작되어 풍물패놀이가 이어지고 풍물패의 풍물놀이의 축제분위기 속에서 마을별로 주민들은 정월대보름 당산제 제례와 제례 후 정월대보름 민속놀이 소품 준비를 한다. 정월대보름에는 고을 주민전체가 참여하여 중거리당산제를 지내고 민속놀이를 한다.1)거리당산제 및 풍물패거리당산제는 마을의 연운(年運)과 식재(息災)와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로, 보통 당산이 세워진 마을별로 지냈다. 마을사람들은 당산에 부정한 사람을 막고자 하는 의도로 당산 주위에 황토 흙을 뿌리고 당산, 당목에 금줄을 친다. 이때 당산제 제주로 선출된 사람은 정결한 몸가짐을 위해 한 달간 부정한 곳(초상 혹은 출산하는 집)의 출입을 금해야 하며 매일 목욕재계로 제관의 품위를 지켜야 했다.정월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 고창읍내의 거리마다 농악놀이를 한다. 마을과 지역민 개인의 집안의 잡귀를 몰아낸다는 속설이 있기에 고을과 주민의 가정을 돌며 굿거리로 안택굿을 쳐준다.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중거리당산제의 건립기금을 조달받고 그게 마무리되면 풍물패(건립패)들은 중거리당산 마당에 모여 당산굿을 쳐서 당산신을 모셔오는 굿 놀이를 한다.2)소품 설치 및 제작줄 제작에 있어 정초부터 동부(샌님), 서부(마님)로 나뉘어 제작한다. 공동으로 짚의 소요량을 분담하여 암줄과 숫줄의 길이는 50m 직경은 30cm 가량의 굵은 줄을 드려서 암숫줄의 머리 부분에 큰 고리를 지어 각 고리와 줄이 이어지는 부문에 각기 줄패장이 올라설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각기 고리의 맨 앞 가운데 부분에 줄패장이 잡고설 수 있는 튼튼한 젖줄을 달아맨다.연등을 제작함에 있어, 6M 긴 장대를 축으로 하여 맨 위에서부터 등을 달 수 있는 적당한 간격으로 횡목을 대어 내려오면서 연등을 다는데 맨 위에 하나, 그 다음 줄에 3개, 그 다음 줄은 5개, 그 다음은 7개, 그 다음은 9개를 매달고, 그 다음은 11개를 매달아 36개의 연등을 단다. 각기 연등간대에는 4개의 젖줄을 매고 간대잡이와 젖줄잡이가 연등을 들고 수월하게 동작할 수 있도록 만든다.기 제작에 있어 동부(동부기와 교촌당산기, 상거리당산기, 중거리당산기, 령기)와 서부(서부기와 중앙당산기, 하거리당산기, 령기)로 나누어 만든다. 이것에 쓰고 남은 대나무나 혹은 줄 제작에 쓰다 남은 짚단을 중거리 당산 앞에 쌓아둔다.정월대보름날 초저녁이 되면 동·서부의 주민들은 풍물패와 제례의 삼헌관과 제관들을 앞세우고 연등과 기를 들고 협동, 제작한 줄을 매어 줄행을 시작한다. 줄행은 고창읍내의 도로를 따라 행진하며 연등간대 잡이와 기간대 잡이는 간대를 흔들어 연등과 깃발이 춤추게 하고 줄 동여꾼들은 춤을 추고 소리 높여 동·서부의 위상을 과시하는 줄 시위굿을 한다.3)중앙당산제중앙당산제는 고을당산제로 동·서부의 줄행이 시작되면 중앙당산제건립패들은 중앙당산에 제구와 제물을 나르고 중앙 당산 앞에 제상을 차린다. 3헌관(초헌, 아헌, 종헌)을 비롯하여 축관, 홀기, 집례 2인을 선임하여 심신을 정결하게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 당산제 홀기에 의해 진행하고 고을 5방의 모든 주민이 참여하여 지낸다. 축관의 축문을 사르는 것으로 당제를 마감하고, 당제가 끝나면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으로 뒤풀이 마당이 이어지고 제관의 음복에 이어 당제음식을 나눠먹는다.4)대보름 민속놀이당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로 중거리 당산을 남북을 기점으로 동부(남자)와 서부(여자)의 두 패로 갈라서서 연등놀이가 펼쳐진다. 양쪽에 각기 진을 치고 있는 연등간대에 매어 달린 연등의 초롱불을 향해 달려가 상대방의 연등을 많이 끄는 편이 이기는데 여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먼저 만들어진 암줄과 숫줄을 사람으로 비유해주어 암수의 합방을 시도하는 줄예맞이를 올려준다. 동부 샌님 줄의 고리를 서부 마님줄의 큰 고리 속에 넣고 샌님줄의 고리와 마님줄의 큰 고리가 엉켜 겹치도록 튼튼한 원목비녀장을 질러 남녀교합의 의미를 살려 예맞이를 치룬다. 이때 예맞이 차례는 제례의 전통혼례의 홀기에 준한다.줄예맞이가 이루어지고 나면 남자샌님패(동부)와 마님패(서부)로 나뉘어져 힘껏 당기는 줄다리기를 통해 서로의 힘의 승부를 겨룬다. 삼세판의 승부를 겨루는데, 마님패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해서 샌님패들이 짐짓 져주기도 한다.5) 당산 옷 입히기 및 대보름 달짚 소망놀이줄다리기에서 이긴 패의 줄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중거리 당산에 감아올려 당산에 옷을 입히는 줄행을 행한다. 이것이 마감되면 마을의 액운과 주민들의 각 가정의 잡귀를 멀리 쫓는 의미로 대나무를 태우고 풍물패를 앞세워 당산 주위를 돌면서 참가자 모두의 흥취 있는 자진모리가락의 마당놀이가 엮어져 주민 모두의 화합마당이 펼쳐진다.현재 고창오거리당산보존회의 경우 당산제에 참여하는 다수의 인원이 생업에 종사하는 마을 주민으로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전수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매월 15일에 있는 이사회를 통해서 각 담당하고 있는 분야의 실정이나 문제점 등을 공유하면서 보존회 내의 전수교육 등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있다.줄 제작은 전통 한옥 초가의 이엉과 용마름의 장인 조병률의 주도로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월암 마을 주민이 참여한다. 좋은 줄을 제작하기 위해서 적절한 품종을 선택하여 벼농사를 재배하고 수확해서 줄을 엮는다.풍물패는 고창농악보존회장(전북무형문화재 제7-1호)인 이명훈의 지도로 보존회 회원들 중심으로 지역특색의 농악가락이 전수되고 있다.◎ 전승계보오거리당산제는 일제강점기부터 마을 연합굿이 중단되었고 각 마을 단위에서만 간소하게 당산제를 지내왔다. 이후 오거리당산의 민속자료적인 가치가 주목되어 1968년에 학계에 오거리당산의 민속자료적인 가치가 주목되어 오거리당산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오거리당산 중 중거리, 중앙, 하거리당산이 1969년 12월 6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오거리당산이 민속자료로 지정된 후에도 당산제는 바로 복원되지 못했고, 1981년<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가 결성된 후에야 오거리당산제가 마을들이 연합한 당산제 형태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오거리당산제는 2006년 제47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2007년에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37호 고창오거리당산제 보유단체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오거리당산제는 일제강점기이후 침체기를 맞아 중단되었다가 다시 복원이 되었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하지만 오거리당산제는 정초에 행해지는 마을굿으로서 기껏해야 일 년에 한번 시행되는 제의이다. 당산제의 복원 주체들은 수십 년 동안 미미하게 있어왔던 당산제를 지역주민들에게 알리고 후세들에게 전승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월대보름의 오거리당산제와는 별도로 오거리당산제보존회의 초대회장인 오성탁 교장과 설태종 현 회장이 근무하고 있는 고창여자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오거리당산제가 마을굿의 맥락과는 별도로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에 오성탁 교장은 고창여자중·고등학교에서 학교의 특별교육 프로그램으로 오거리당산제를 가르치고 공연하자고 했으며, 당산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성탁 교장은 과거 자신이 참여했던 적이 있는 당산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창 출신인 교사 설태종에게 오거리당산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오거리당산제의 복원 활동에 참여시켰다.현 보존회장인 설태종은 오성탁 교장으로부터 오거리당산제의 목적과 의의, 전체 과정에 대한 내용에서부터 소품을 만드는 법, 놀이를 하는 방법 등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오성탁 교장에게서 정보를 구할 수가 있었다. 오성탁 교장은 이 시기에 고창문화원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오거리당산제에 대한 세세한 정보들을 확보하는데 문화원에서의 활동과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과의 교류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현재 보존회의 조직은 회장과 부회장(4명)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2009년 현재 이사 24명, 감사 2명 등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264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보존회는 당산제를 지역주민들에게 알리고 후세들에게 전승해야 할 필요를 느껴 당산제를 지낸 후 다양한 민속행사를 함께 하고 있다. 특히 2017 문화재청 지정 고창 문화재 야행 프로그램에 오거리당산제보존회가 참여를 했다. 고창야행 길꼬내기, 월하기원, 용줄꼬기, 연등놀이, 줄다리기, 당산 옷 입히기 대동놀이 시연을 위해 전수교육이 각각 분야별로 이루어졌다.기껏해야 1년에 한번 정월에 지내는 제의인 당산제를 민속행사나 문화재 야행을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어져 온 전통을 재확인하고 지속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 오거리당산제는 전국에서 유일한 가족 당산 형태로 된 마을의 풍수지리적인 무형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을 연합굿이 중단된 채로 각 마을의 간소화된 당산제만이 남아 그 맥을 유지하였다.이를 복원·계승하기 위해 1981년 고창오거리당산제보존회가 결성되었다. 오거리당산제를 지역주민에게 널리 알리고 후세들에게 전승하기 위한 복원작업과 공연 활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오거리당산제는 마을굿의 맥락과는 다른 공연작품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오거리당산제는 제의를 주요 축으로 하여 일과 놀이가 결합되는 행위의 집합으로, 전통적인 의례행위와 놀이 행위가 풍부하다. 제관 선출·금기·유교식 제사에서는 일련의 제사 행위가 포함되어 있고, 줄다리기의 ‘줄예맞이’에서는 비록 간소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혼례 행위를 찾아볼 수 있다. 놀이의 면에서는 풍물굿, 연등놀이, 줄다리기 등이 포함되어 풍부한 전통 놀이 행위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고창의 마을이 연합해 중앙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굿으로 공동체성을 찾는데 의미가 있다.보존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회원들은 마을 연합굿으로서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 각각 소품을 제작하고 역할들을 분담하여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렇듯 회원들의 적극성과 결속력이 오거리 당산제 보전의 원동력이다.현재 보존회 회원들의 고령화와 인력감소로 전승인력의 감소가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존회에서는 귀농귀촌하는 젊은 지역주민들을 유입하고 연계하여 전승인력 기반을 확보하는 등 보호방책을 마련하고 있다. | ||
17 | 윤도장 | 공예 | 윤도 | 국가무형문화재 | 1996-12-03 | 110 | 고창군 | 조선시대에는 풍수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윤도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뱃사람이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천문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子午]을 정하는데도 윤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휴대용 해시계에는 간단한 윤도를 함께 붙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작고 단순한 모양의 2, 3층짜리 윤도를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부채에 매단 선추(扇錘)는 12방위 또는 24방위만을 표시한 소형 지남침으로 가장 실용적인 멋을 가졌으며, 그 아름다운 조각과 더불어 조선의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윤도는 묘자리를 보는 지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이던 생활 과학 도구였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 서구의 문물의 영향으로 윤도와 관련된 학문들이 미신으로 격하되어 쇠락하면서 윤도 역시 잊혀지게 되었다. 지금은 몇몇 지관들과 가보(家寶)로 소장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대기업에서 연말연시 외국인들에게 선물용으로 수요가 조금 늘어나고 있지만 한 작품을 만드는데 한 달에서 길게는 두세 달이 걸리기 때문에 대량 생산과 판매는 어렵다고 한다. 비록 윤도장일이 이익이 없더라도 가업으로 계승하라는 백부의 유언을 받아들여 시작하게 된 보유자 역시 큰아들에게도 가업을 계승하게 했다. 현재 큰아들인 김희수는 전수교육조교로 윤도장 제작 기술을 배우고 있으며, 손자 역시 전수장학생으로 가업을 5대째 이어오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어렵고 힘든 길을 가업으로 대물림함으로써 전통기술이 단절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승과 전수교육 활동에 거는 기대가 크다. 현재 정교한 손끝을 가진 ‘전통 나침반’의 명인인 김종대 보유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윤도장은 윤도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윤도는 지남반(指南盤), 지남철(指南鐵) 혹은 패철(佩鐵) 등으로 불리는 윤도(輪圖)는 지남성(指南性)이 있는 바늘, 즉 자침(磁針)을 활용하여 지관들이 음택과 양택 등 풍수지리를 보거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기 위해 사용하던 일종의 나침반을 말한다. 지남침의 원리는 중구 한대(漢代)에 이미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윤도가 쓰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윤도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천문학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아 윤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 신라의 박사(博士)제도 중에 천문 박사가 있었고, 백제에서는 천문학을 담당하던 일관부(日官部)를 두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를 보아도 당시에 음양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역법(曆法)과 주역(周易)이 수입되어 신라에서는 박사와 조교를 두고 주역을 가르쳤다. 이렇게 주역과 천문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이미 윤도가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통일 신라 말에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풍수도참 사상이 발달하면서, 윤도는 지상(地相)을 보는데 중요한 기구가 되었고 이는 고려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가 되면 이전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윤도(輪圖)’라는 명칭이 실록에 보인다. 선조 33년(1600년)에는 명나라에서 온 지리에 밝은 이문통(李文通)이 나경(羅經)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윤도처럼 생겼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윤도가 쓰이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나경이라는 명칭으로 윤도와 같은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7년(1731년)에 허원(許遠)이라는 사람이 새로 지남철을 만들었는데, 해의 그림자를 취하여 남북을 정하니 그 법이 아주 정밀했다. 또한 영조 18년(1742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중국에서 구해 온 천문도(天文圖)와 5층 윤도는 모두 천문, 지리의 쓰임에 요긴한 것이므로 본떠 만들기를 청해 허락했다. 관상감에서 윤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윤도에 별자리로 점을 치는 점성술의 요소와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절후 등이 있는 것과 일치한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 주목할 만한 사실은 풍수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윤도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뱃사람이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천문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子午]을 정하는데도 윤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휴대용 해시계에는 간단한 윤도를 함께 붙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작고 단순한 모양의 2, 3층짜리 윤도를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부채에 매단 선추(扇錘)는 12방위 또는 24방위만을 표시한 소형 지남침으로 가장 실용적인 멋을 가졌으며, 그 아름다운 조각과 더불어 조선의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 발달하였다. | 윤도는 중심에 자침을 두고 24방위를 기본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에 쓰여진 방위(方位)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음양(陰陽), 오행(五行), 팔괘(八卦),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 및 24절후(節侯)가 조합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때문에 윤도는 고대 동양인들이 우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로 체계화한 음양오행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윤도의 재료로는 대추나무나 회양목·은행나무를 쓰는데, 이 나무들은 눈매가 곱고 단단하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한 것들이다. 박달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김종대 윤도장은 무르고 가볍기 때문에 박달나무를 잘 사용하지 않고 대추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대추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말려 놓으면 잘 트지 않을 뿐 아니라 비단결같이 윤기가 나면서 오래 갖고 다닐수록 색이 더욱 빨갛고 곱게 나기 때문이다.무주, 보은, 단양, 제천 등지에서 200~300년 된 대추나무나 회양목을 가져다 1년간 물에 담가 진을 뺀 다음 또 1년을 그늘에 말려 뒤틀림이 없게 한다. | 조선시대에는 풍수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윤도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뱃사람이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천문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子午]을 정하는데도 윤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휴대용 해시계에는 간단한 윤도를 함께 붙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작고 단순한 모양의 2, 3층짜리 윤도를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부채에 매단 선추(扇錘)는 12방위 또는 24방위만을 표시한 소형 지남침으로 가장 실용적인 멋을 가졌으며, 그 아름다운 조각과 더불어 조선의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 발달하였다.이렇듯 윤도는 묘자리를 보는 지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이던 생활 과학 도구였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 서구의 문물의 영향으로 윤도와 관련된 학문들이 미신으로 격하되어 쇠락하면서 윤도 역시 잊혀지게 되었다. 지금은 몇몇 지관들과 가보(家寶)로 소장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대기업에서 연말연시 외국인들에게 선물용으로 수요가 조금 늘어나고 있지만 한 작품을 만드는데 한 달에서 길게는 두세 달이 걸리기 때문에 대량 생산과 판매는 어렵다고 한다.비록 윤도장일이 이익이 없더라도 가업으로 계승하라는 백부의 유언을 받아들여 시작하게 된 보유자 역시 큰아들에게도 가업을 계승하게 했다. 현재 큰아들인 김희수는 전수교육조교로 윤도장 제작 기술을 배우고 있으며, 손자 역시 전수장학생으로 가업을 5대째 이어오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어렵고 힘든 길을 가업으로 대물림함으로써 전통기술이 단절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승과 전수교육 활동에 거는 기대가 크다.현재 정교한 손끝을 가진 ‘전통 나침반’의 명인인 김종대 보유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
18 | 침선장 | 공예 | 전통복식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2-11-30 | 22 | 군산시 |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의복을 정갈히 하여 격식과 의례에 맞게 입는 것을 예의 시작이라 여겨 의·식·주 문화 가운데에서도 식생활과 주생활보다 의생활 문화를 더 우위에 놓고 예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예의 민족’이요, ‘예의 나라’라 불렀다. 이는 전통복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복식문화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내재시키며 계승 발전되어 왔다. 특히 침선이라는 것,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격식에 맞추어 의복을 입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만큼 의생활 문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이므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이며 우리의 상징물이 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전통 복식과 침선을 소중히 여기며 전승해나가고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 조선시대에 왕실 가족의 의생활을 담당하는 궐내각사 중 한 곳인 상의원(尙衣院)은 태조 때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상의사(尙衣司)로 바뀌었다가 1905년에 다시 상방사(尙方司)로 고쳤으며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복식을 언제든지 공급할 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두었다. 『경국대전』의 상의원 조직을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상의원은 정3품아문에 소속되는데, 제조 2명, 부제조 1명, 별좌와 별제를 합해서 2명, 주부 1명 이상이 맡는다고 하여 조선 초 상의원 소속 관리직은 6명이었다. 장인은 경공장과 외공장에 소속되어 있는데 경공장은 다시 본조인 공조와 봉상시·내의원·상의원·군기시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상의원 소속 장인이 가장 많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소속 장인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68종복에 59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인은 의대색·교자색·금은색·직조색으로 나누는데 침선장은 의대색 안에 배속되었다. 이때 침선비 20명을 공장이 아닌 상의원에 별도로 배속시켜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복식을 원활하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현재까지 침선장의 업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침선비(針線婢)에 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침선을 담당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분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상의원, 제용감, 공조에 소속되어 궁궐에 출입하는 장인인 침선장과 다른 하나는 침방이나 수방에 소속된 하급 실무자로서 궁궐에 살면서 직접 바느질 및 세탁 보관을 담당하는 관비인 침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현재의 침선장은 침선 실기능력과 이해 정도, 전수교육 경력, 입상 실적 등을 비롯하여 세부적인 전승 환경 등을 전문가로 구성된 문화재 위원회의 여러 단계에 걸친 종합적인 심사를 통하여 선발하고 있다. | ◎ 전승내용 임순옥 침선장은 전통복식을 제작하고 있다. 전통복식을 제작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패턴 제작, 그 패턴에 따른 원단 재단, 재단한 원단을 바느질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임순옥 침선장은 지금까지 연구발표된 조선시대 궁중 복식과 사대부 복식을 모두 제작하여 소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2~3년간 조선시대 사대부의 대표적인 도포를 계속해서 꿰매 왔다. 과거 도포 제작의 구성법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요소들까지도 가미하여 원단과 디자인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임순옥 침선장은 다른 침선장들과는 달리 한복매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한복을 제작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한복 매장을 운영해온 임순옥 침선장이기에 전통복식 제작을 위한 재료나 용구, 그리고 원단까지 두루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한복을 입으면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하며 쉽게 입을 수 없는 옷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지는 등 전통한복의 맞춤 수요의 급감과 퓨전한복의 대여 증가로 원단이 달라져 전통문양과 전통 직조법으로 만든 원단들은 생산 판매가 거의 중단된 형편이다 보니 유물을 고증하여 제작하는 경우 그 작품에 필요한 원단 수급이 어려운 현실이다. 현재 제자들의 전수교육은 매주 화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진행된다. 2013년도부터 2014년까지는 조선시대 백관의 단령 수업을 하였고 2015년부터 2016년도까지는 도포 수업, 2017년도부터는 태조 이성계의 청룡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전승현황 며느리이자 전수 장학생인 이영주(41세)가 전통복식디자인으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전통복식 관련 강의를 하며 를 잇기 위해 침선수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일반 제자로 송년순(72세), 정인순(62세), 김영자(62세), 신애자(52세) 등이 한복관련 업종에 종사하면서 꾸준히 수업을 받고 있다. |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의복을 정갈히 하여 격식과 의례에 맞게 입는 것을 예의 시작이라 여겨 의·식·주 문화 가운데에서도 식생활과 주생활보다 의생활 문화를 더 우위에 놓고 예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예의 민족’이요, ‘예의 나라’라 불렀다. 이는 전통복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복식문화에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내재시키며 계승 발전되어 왔다. 특히 침선이라는 것,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격식에 맞추어 의복을 입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만큼 의생활 문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이므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문화이며 우리의 상징물이 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전통 복식과 침선을 소중히 여기며 전승해나가고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 ||
19 | 호남넋풀이굿 | 의례 | 넋건지기굿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07-10-05 | 38 | 군산시 | 굿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에서 출발하여 기층민 사회인 농어촌 사회가 중심이 되어 당대 민중들의 생활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세부 지역에 따라 지역적 차별화가 있다. 전북은 부안,고창,군산으로 이어지는 해양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륙중심의 문화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호남넋풀이굿에는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도서지역에서 뱃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삶과 애환 속에서 무사기원을 위한 굿뿐만 아니라 굿의 연행 방법을 통해 바다와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일단을 알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하진순 보유자는 논문을 통해 호남넋풀이굿의 기록화를 진행하였다.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말이 있다. 굿을 함으로써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죽은 자의 넋이 건져져서 저승으로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무속의 기능뿐 아니라 민중의 생활상을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진순 호남넋풀이굿 보유자는 무속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과 무시 그리고 잘못된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굿 협회 주관으로 광화문에서 나라굿(나라를 위한 굿-날 가물면 기우제 등)을 연행하였다. 하지만 언론은 정치적인 문제와 연계시켜 기사를 냈고, 이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TV에서 방영한 사극 드라마에서는 종종 무속인이 사람을 죽이는 굿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보유자는 이에 대하여 사람이 잘 되는 굿은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굿은 없다고 말한다. 드라마가 허구임을 밝혔을 지라도, 일반인들에게 무속에 대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호남 넋풀이 굿은 도서지방에서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사고로 바다에서 죽은 망자(亡子)의 넋이 땅위로 건져지면, 이를 극락왕생(極樂往生)할 수 있도록 빌어주는 무속 의식(넋 굿)이다. 호남지방의 유일한 강신굿이며 군산 지역의 독특한 지역성과 예술성이 담겨있는 무속(巫俗) 의례이다. 넋 굿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 어촌이나 항구도시에서 뱃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물에 빠져 죽게 되면 진혼제를 베풀어 죽는 넋을 기리는 굿이 오래전부터 성행했는데 혼 건지기, 수망 구, 넋 굿, 넋풀이 굿 등으로 불린다.인간에게는 제각기 영혼이 있다고 믿어지고 죽음이란 그 영육분리의 결과로 사람이 죽고 난 뒤 저승으로 가게 마련인 가운데, 이승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 영 떠나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이승을 헤매고 다니면서 사람에 붙어 괴롭히는 등 갖가지 횡액을 부리고 다닌다고 믿고 있으며, 공포의 대상으로 갖가지 제변이나 액의 원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망이 길잡이가 되어 죽은 원신을 모시고 그 원령을 달래는 넋 굿을 하면 죽은 넋은 부정을 벗고 자손들의 복락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관 내지 가치관에 굿을 한다.넋풀이 굿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의뢰를 하면, 무당이 혼자서 춤추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굿의 의식절차와 무가사설, 선율 및 장단을 가지고 있다. 또한 넋풀이 굿은 화해의 기능과 통합의 기능이 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맺힌 것을 풀어주는 화해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바리공주무는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더니 바리데기가 죽을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에 가서 약물을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린다는 이야기 이다. 또한 통합의 기능이 있다. 굿은 집을 기준으로 하여 집안에서 하는 굿을 안 굿, 집 밖에서 하는 굿을 바깥 굿으로 구분한다. 집안은 신성한 곳이며 부정한 것은 들어올 수 없다. 굿을 할 때에도 부정을 물리치는 것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분과 부정한 귀신을 먹여 보내는 마지막 부분은 집 바깥에서 행해진다. 부정한 망령이나 잡귀가 굿이라는 의례를 통하여 조상과 마을의 수호신으로 변화하는 것을 통해 집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관계가 강조되고, 잡귀 등이 존재하는 밖에 대해서는 마을 단위의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는데, 집안에서의 결속의 기능이 마을 단위로 확대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 전승내용굿은 크게 가제(家祭 개인굿)와 당제(堂祭 공동제) 2가지이다. 가제는 재수 굿(ex. 무사고, 만선 기원)과 넋 굿으로 나뉜다. 특히 넋 굿은 죽은 원신을 모시고, 그 원령을 달래기 위해 베푸는 굿으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해 가는 길잡이가 무당이다. 굿 하는 과정에서 맺혔던 한을 풀어준 다음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저승문을 열어주고, 저승으로 가기 전 생전의 서운했던 일들을 말하는 과정을 통해 넋 굿이 맺힘과 풀림, 막힘과 열림, 단절과 연장의 구조를 가진다.현재 하진순 보유자가 전승하는 호남 넋풀이 굿의 의식절차는 안택굿, 넋 건지기, 넋 맞이 등 3단계로 구분된다. (1)안택굿은 굿 의뢰자인 망자 가족의 집을 영가집이라고 하는데 안택굿은 영가집에서 이루어진다. (2)넋 건지기 굿은 망자가 빠져죽은 바닷가에 임시 포장을 쳐서 굿청을 마련한 후, 굿청 옆에 높다란 깃대를 꽂고 여기에 기다란 천을 늘어 뜨려 바다 또는 강과 육지가 연결되게 하고 의식을 진행한다. (3)넋 맞이 거리에서는 영가집 마당 한 가운데 덕석을 깔고 넋맞이상을 차려놓는다. 넋 맞이 굿은 경문 읽기, 씻금, 넋 종이 만들기 등을 진행한다.특히 넋 건지는 굿 의식 중 머리카락을 건지는 과정에서 식구들이 머리카락을 그 사람의 것으로 인정하면 넋이 차가운 바다에서 따뜻한 육지로 건져지는 것이 된다.(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 또는 중간 머리) 그 넋이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라고 한풀이도 해준다.◎전승계보호남 넋풀이 굿 예능보유자 하진순은 1984년 전북 남원읍에서 태어났고, 1962년 초등학교 3학년(16살) 때 부모를 따라 군산으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유 없는 병을 많이 앓았는데, 21세 신이 들려 법사였던 부친의 권유로 전북 완주 출신 양영자 무당으로부터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되었다. 1972년 23세에 대전 중앙시장 대형화재를 예언하여 유명해졌다. 소련에서 굿과 강연, 독도(안영복)에서 나랏굿, 정읍고부 녹두장군 굿, 전주 덕진공원에서 광복 60주년 굿, 마포나루터 굿(1~4회) 등을 연행하였다. 결혼 후 서은희(1974~, 막내딸 내림 굿 받음, 무용가 및 호남 넋풀이굿 1호 이수자)을 낳고 이듬해인 75년부터 무당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진순은 특히 재수굿을 많이 하였다.◎전수교육 현황하진순은 1999년부터 “호남 넋풀이 굿 보존회”를 설립하여 굿을 전수하기 시작하였고, 2007년 10월 10일 전라북도 호남 넋풀이 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지정 이래 2008년 4월 27일 제 1회 호남 넋풀이 굿 정기공연을 은파 호수 공원에서 실시하였고, 매년 정기공연을 진행하고 있다.그에 따르면 제자들은 열두거리 굿을 모두 해야 하며, 상차림, 경읽기, 고빼춤, 사설 등을 가르친다고 한다. 서은희(딸, 호남 넋풀이 굿 1호 이수자) 이래, 이이숙(61세, 수양딸, 호남 넋풀이 굿 2호 이수자)이 현재 2호 전수 장학생으로 있다.하진순은 무속은 구전으로 전승되기 때문에 책으로 남겨야겠다는 신념으로 늦은 나이에 대학원 논문을 완성하였다. 전라남도의 굿 하는 소리는 아주 구슬프지만, 전라북도의 소리는 중성으로 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소리교육에도 신경 쓰고 있다. 또한 현재 남원 도립 국악원에서 김우철 선생과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다. | 굿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에서 출발하여 기층민 사회인 농어촌 사회가 중심이 되어 당대 민중들의 생활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세부 지역에 따라 지역적 차별화가 있다. 전북은 부안,고창,군산으로 이어지는 해양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륙중심의 문화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호남넋풀이굿에는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도서지역에서 뱃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삶과 애환 속에서 무사기원을 위한 굿뿐만 아니라 굿의 연행 방법을 통해 바다와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일단을 알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또한 하진순 보유자는 논문을 통해 호남넋풀이굿의 기록화를 진행하였다.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말이 있다. 굿을 함으로써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죽은 자의 넋이 건져져서 저승으로 잘 이어지기를 바라는 무속의 기능뿐 아니라 민중의 생활상을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하진순 호남넋풀이굿 보유자는 무속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과 무시 그리고 잘못된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굿 협회 주관으로 광화문에서 나라굿(나라를 위한 굿-날 가물면 기우제 등)을 연행하였다. 하지만 언론은 정치적인 문제와 연계시켜 기사를 냈고, 이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TV에서 방영한 사극 드라마에서는 종종 무속인이 사람을 죽이는 굿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보유자는 이에 대하여 사람이 잘 되는 굿은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굿은 없다고 말한다. 드라마가 허구임을 밝혔을 지라도, 일반인들에게 무속에 대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
20 | 판소리 | 음악 | 춘향가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3-10-25 | 2 | 김제시 | 이용길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사사 받았는데, 특히 김세종제 <춘향가>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사설이 잘 다듬어져 있어 기품이 있기 때문에 최고라고 말한다. 이용길 명창의 예술세계에서 판소리는 열정의 결정체이자 인생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꽃은 판소리라고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판소리를 포기 할 수 없었던 그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우리나라 일류 소리꾼을 전부 모셔다가 창극 심청전을 하여, 본인이 심봉사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국 심사를 다니면서도 심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판소리 후배들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남성 명창은 손에 꼽는데, 송순섭(국가지정중요문화재), 이용길(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왕기석(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뿐이다. 판소리는 본래 남성들이 하던 소리였으나 생업 유지 어려움으로 많은 전수자들이 중도 하차하는 점이 아쉽다고 한다. 이용길은 열정 있는 남창들이 꾸준히 판소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2003-11-07 |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꾼이 고수(敲手)의 북 반주에 맞추어 말, 노래, 몸짓을 섞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공연예술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이며, 판이란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뜻하며, 소리는 ‘노래를 통칭하는 예스러운 표현’이다. 판소리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리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실내 공연장 무대에서 연행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판놀음으로 실외에서 벌어졌다. 판소리꾼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겉옷인 창의(唱依)를 입고, 갓을 쓰고,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서서 소리를 하며, 고수는 북을 앞에 놓고 바닥에 앉아 서로 마주 보면서 호흡을 맞춰나간다. 고수가 ‘얼씨구’, ‘으이’, ‘좋다’ 당의 감탄사를 소리의 중간 중간에 넣는데 이것을 추임새라 하고, 이는 사람의 흥(興)을 돋우어 주는 역할을 한다. 부채로 하는 몸짓을 ‘너름새’, ‘발림’ 이라고 하며 이는 극적인 상황을 몸짓으로 그려내어서 시각적인 효과를 더한다. 판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공연예술이기도하기 때문에 종합예술로 이해되어야 한다. | ◎ 전승내용득음을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모든 소리를 받쳐 줄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장소는 ‘굴’이라고 한다. 소리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랫배 단전을 사용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을 상청 하청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식생활을 잘해야 하고, 호흡 및 감정, 자세, 마음가짐도 조절해야 한다.◎계보판소리 5마당 중 <춘향가>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김제시)가 되었다. 1935년 김제에서 출생하였고 1958년부터 근대 5명창 중 이동백 명창의 제자인 강장원 선생의 수제자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궁가를 주로 배우고, 수궁가와 심청가도 일부 배웠다. 강장원 선생의 소리는 극적인 요소(너름새)가 적어서 서편제와는 멀고 동편제랑 가까웠다. 박초월 선생에게 홍보가를 정광수 선생에게 적벽가 삼고초려를 배웠다. 이후 정권진 선생에게 청가와 춘향가를 배웠는데, 1975년 전수장학생, 1982년 이수자로 지정되었다. 마지막 적벽가는 정철호 선생에게 배웠다. 1994년 판소리 종합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80년대에는 조상현 선생과 함께 다양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소리를 했다. 1989년 헝가리 등 동구권 9개 국가 순회공연을 하였고, 각종 고수대회에서 출연명창으로 소리를 하였다. 꼭 무형문화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미루었지만, 제자들이 나서서 2013년 김세종 바디 <춘향가>로 전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이용길은 다섯 바탕을 다 사사 받았는데, 김세종제 춘향가가 최고라고 말한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사설이 잘 다듬어져 있어 기품이 있기 때문이다.◎전수교육현황이용길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하지만 김세종제 춘향가 위주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부터 60년 이상 제자를 가르쳐 왔으며, 길러낸 제자들은 수백여 명 되는데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많다. 2000년부터 제자 발표회를 했고, 오래된 제자들은 약 20명 정도가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조중천, 정경화, 박순희, 임인환, 김금자 등이 있다.이용길은 서울과 김제에서 제자양성을 하고 있는데, 김제에서는 충남 전라도 지역 제자들을 대상으로 매주 목, 금에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서울국립국악원 내 한국전통예술문화학교에서 17년차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는 일주일 1번 3시간 수업을 통해 매년 30명 정도 학생을 배출하는데, 수업은 디딤과정 1년과 돋움과정 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첫 이수자로 김제, 충남, 서울의 3명의 이수자를 신청하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 이용길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사사 받았는데, 특히 김세종제 <춘향가>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사설이 잘 다듬어져 있어 기품이 있기 때문에 최고라고 말한다. 이용길 명창의 예술세계에서 판소리는 열정의 결정체이자 인생이다. 그는 전통문화의 꽃은 판소리라고 하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판소리를 포기 할 수 없었던 그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그의 마지막 바람은 우리나라 일류 소리꾼을 전부 모셔다가 창극 심청전을 하여, 본인이 심봉사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국 심사를 다니면서도 심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소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판소리 후배들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남성 명창은 손에 꼽는데, 송순섭(국가지정중요문화재), 이용길(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왕기석(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뿐이다. 판소리는 본래 남성들이 하던 소리였으나 생업 유지 어려움으로 많은 전수자들이 중도 하차하는 점이 아쉽다고 한다. 이용길은 열정 있는 남창들이 꾸준히 판소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
21 | 김제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1-09-30 | 7 | 김제시 | 김제농악의 특징이라 하면 편성에 있어서 쇠와 장구를 주악기로 하고 있으며 큰 북은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잡색에는 광대가 많고 두레를 감독하는 좌우집사와 창부가 쓰는 관에 어사화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판굿은 김도삼류 굿이 전승되고 있는데, 도둑잽이와 일광놀이 같은 군사놀이가 행해진다. 이 밖에 탈머리에서 하는 외부침입자를 잡는 군사놀이가 돋보인다. | 2014-11-28 | 김제농악은 조선시대 후기의 『조선왕조실록』에 19세기 초반 김제 지역 인근에 두레 농악이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김제는 우리나라 수전농업의 기원을 이루고 농경문화의 꽃을 피웠던 벽골제가 있었던 곳이다. 이런 기반 위에서 증산교에서 농악을 교서에 올리는 등의 포교 수단이 되면서 농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대동굿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김도삼, 나도숙, 현관쇠, 백남윤 등에 이르러 좀 더 전문적인 집단 형태의 농악으로 발전하였다.일제강점기에는 김제 출신 현판쇠라는 유명한 쇠잽이가 나와, 김제농악을 활성화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김제·정읍·부안 등지의 농악 명인들이 하나의 농악 단체를 만들어 공연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1967년에 이루어진 『호남농악 조사보고서』는 김제 쇠잽이 현판쇠를 상쇠로 하여 조사되었다. 이 무렵에는 안재홍, 박판열, 김문달 등의 유명 치배들도 활동하였다. 1970~1980년대에 오면 김문달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백구여성농악단’이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였고, 전주대사습놀이 전국 대회에서 두 차례 입상하였다.1990년대에 박판열, 이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에 위 예능보유자가 작고하고, 다시 박동근, 김해순이 예능보유자(장고)로 지정되어 김제농악의 맥을 잇고 있다.일찍부터 각 마을에서 대동굿의 형태로 농악을 전승해 오다가 좀 더 전문적인 예인 집단에 의한 농악으로 발전되었다. 김제농악은 인근 정읍, 부안, 이리, 익산 등지의 농악과 같은 형태를 지닌 호남우도농악의 계승지이다. | ◎ 전승내용김제농악은 현재 마당밟이굿/걸립굿, 판굿/연예농악으로 전승되어지고 있다. 마당밟이굿/걸립굿은 박동근이 잘 보존하고 있으며, 판굿/연예농악은 김해순이 잘 계승하고 있다. 마당밟이굿은 1) 어룸굿, 2) 청령굿, 3) 당산굿, 4) 동네 우물굿, 5) 집안굿 ①문굿, ②집안 우물굿, ③조왕굿, ④철룡굿, ⑤곳간굿/노적굿, ⑥성주굿, ⑦마당굿, ⑧인사굿 등의 순서로 이루어진다.판굿은 내드림, 느린 오채질굿, 잦은 오채질굿, 풍년굿, 양산도, 늦은 삼채, 잦은 삼채, 벙어리삼채, 오방진, 호호굿, 거듬살이,미지기, 두마치굿, 일광놀이, 짝다드라기, 구정놀이, 문굿, 도둑잽이, 탈머리굿, 탈복 순으로 진행된다.박동근 보유자가 전승되고 있는 마당밟이 굿의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마당밟이굿은1) 어룸굿2) 청령굿3) 당산굿4) 동네 우물굿5) 집안굿①문굿②집안 우물굿③조왕굿④철룡굿⑤곳간굿/노적굿⑥성주굿⑦마당굿⑧인사굿등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김제농악의 치배 편성은 기수, 앞치배, 뒷치배로 구성된다.기수: 용당기 1, 농기 1, 영기 2앞치배: 쇠 3, 징, 장고 3, 북, 법고 8, 나발잡색: 대포수, 구대진사, 양반광대, 좌우집사, 각시광대, 중광대, 무동 한 쌍, 조리중◎전수교육 현황김제 지역에는 단체 농악단 3개, 마을 농악단 11개, 청소년 농악단1개가 활동하고 있다. 단체 농악단 3개 중에서 2개는 예능보유자 2인이 운영하는 농악단이다. 현재 김제농악의 마을농악 혹은 마당밟이 농악의 예능은 도무형문화재 박동근이 잘 모본하고 있으며, 연예농악 판굿의 예능은 고 박판열의 제자 김해순이 보존 전승하고 있다.◎전승계보김제농악 장고잽이 계보로는 김홍집(정읍)-김대근(부안)-이명식(정읍)/안재홍(김제)-박판열(김제)-박동근/김해순(김제)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보유자 박판열(朴判烈. 1916년 7월14일 김제군 부량면 대평리 대장마을 출생. 설장고)을 중심한 김제 우도농악은 대평리의 두레풍장을 기초로, 주로 정읍농악의 우수한 면을 받아들여 발달시킨 농악이다. 박판열은 12세부터 같은 마을의 안재홍(그 당시 50세가량 됨) 상쇠가 이끄는 두레풍장에서 장구를 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박판열은 20세부터 십년간 틈틈이 정읍을 다니며 영원면의 이명식으로 부터 장구를 연마하는 한편, 김광래 상쇠·김병천 상쇠·현판쇠 상쇠·이정범의 여성농악단·김한기의 여성농악단에도 참여하여 기량을 펼쳐나갔다.박판열의 고향마을에서는 섣달 그믐날 당산제 때에 마당밟이굿을 친다. 들당산굿, 날당산굿을 친후 집집마다 먼저 시암굿(샘에 절하고 빠른 삼채를 치다가 매도지하곤 마당으로 나와 질굿을 친다. 주인이 술상을 내오면 마시고는 정주굿(조왕굿)을 친다.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쌀을 소복이 담은 사발을 얹어놓고 굿을 치면 주인이 돈을 한 푼 놓는다. 그러면 상쇠가 “까막까치도 짝이 있다는데 짝이 없어서 안되었다” 하고 주인은 한 푼 더 놓기 마련이다. 조왕굿 재담으론 이밖에도 “별따자 별따자 하늘잡고 별따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음에 철륭굿(“쥐 들어간다 쥐 들어간다 장꽝 밑에 쥐 들어간다 거기 있거라 잡자”)과 성주굿을 친다. 문굿을 칠 때는 두 줄로 서서 서로 교대로 굿을 치고 상쇠는 깃대 꽂은데서 놀다가, 밖으로 나와 일렬로 늘어서서 둘씩 콩똥방똥(등을 서로 대고 번갈아 업음)한 후에 지와밟기를 한다. | 김제농악의 특징이라 하면 편성에 있어서 쇠와 장구를 주악기로 하고 있으며 큰 북은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잡색에는 광대가 많고 두레를 감독하는 좌우집사와 창부가 쓰는 관에 어사화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판굿은 김도삼류 굿이 전승되고 있는데, 도둑잽이와 일광놀이 같은 군사놀이가 행해진다. 이 밖에 탈머리에서 하는 외부침입자를 잡는 군사놀이가 돋보인다. | |
22 | 탱화장 | 공예 | 탱화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02-04-06 | 27 | 김제시 | 불교미술은 같은 계통으로 불상·불화·단청(佛像·佛畵·丹靑) 등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승속(僧俗)과 남녀(男女)를 통틀어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탱화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나라 불교 신앙의 대상과 그 신앙 내용을 도설화한 것이 탱화다. 그러므로 탱화의 내용은 곧 우리나라 불교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의미한다. 탱화가 가지는 가치와 역사성은 불교미술이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뛰어넘어 불교의 근본도리와 정신을 계승하고 현현(顯現) 시킨다는 데 있다. 문화나 역사, 전통이 가지는 힘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시대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탱화는 고려시대의 그림 일부와 조선시대에 제작되어진 다수의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통적인 재료사용과 제작기법은 몇몇 소신 있는 작가들에 의해서 겨우 명맥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일부 탱화작가들은 전통을 계승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편의성에 많이 치우쳐 있다고 한다. 탱화의 전승은 이러한 고려불화의 양식 및 조선불화의 전통기법과 채색을 바탕으로 계승·발전되어져야 할 것이다. 유삼영 도원스님은 주제별 도상(圖上)에 필요한 초본으로 탱화를 조성하여 전통 불화의 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특히 필선(筆線)이 유려하고 구성과 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에 있어 석채(石彩)를 사용함으로써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유삼영 도원스님은 전통적인 재료사용과 제작기법을 계승하여 탱화를 그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탱화 제작기법과 가치를 저변에 널리 확대시켜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 탱화장이란 부처의 행적이나 불법의 존엄성을 불교 경전과 의궤(儀軌)에 따라 종이나 천에 그리는 일 또는 그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탱화장은 금어·양공·화사·화원·화승·탱화질·편수·불모·화수 등으로 불리어 왔다. 금어나 화사는 존칭으로, 화원이나 편수는 전자에 비해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여러 화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넓은 의미의 불화는 불교의 전래 시기와 일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탱화는 고려 후기 이전에 그려진 작품이 전하지 않아 이 시기까지의 탱화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다.고려 후기에 이르면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탱화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탱화들도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어서 탱화장의 본격적인 출현 시기는 고려 후기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탱화는 후불탱과 괘불의 형태로 예배의 대상이 되면서 많이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탱화장이 불교 회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따라서 18세기 초·중반기에 활동한 의겸(義謙)과 같은 화승은 일단의 화승 집단을 결성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무대로 활약하기도 하였다.조선시대까지 탱화장은 탱화 이외에도 조상(造像)·개금(改金)·개채(改彩)·개조(改彫)·단청(丹靑) 등 불교 회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했다. 정조 연간의 화성(華城) 축성 시에는 단청 작업을 위해 동원되는 사례도 볼 수 있다.그러나 조선 말기와 한말에 이르러 대규모 불화 조성이 어렵게 되자 탱화장들은 생계를 목적으로 무격들의 의뢰를 받아 무신도(巫神圖)를 제작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탱화장들 간에 화법의 전수는 주로 사찰 내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근역서화징>이나 <화사보략> 등에 돌림자를 사용한 화승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대체로 한 스승의 문하에서 화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로 여겨진다. | ◎ 전승내용 1. 탱화를 조성하는 방법(1) 먼저 탱화의 주제와 소재를 정한다.(2) 주세불(主世佛)을 중앙에 배치한다.(3) 주불을 중심으로 하여 대칭구도를 잡는데 좌측은 홀수, 우측은 짝수로 대칭구도를 잡아 순서대로 배치한다.(4) 탱화의 밑그림은 출초(出草)로 완성한다.(5) 종이는 한지와 창호지를 쓰는데, 묽게 쑨 풀을 4~5겹으로 배접을 한 다음 마지막에 광목천을 붙여서 사용한다.(6) 그림이 마른 다음 아교를 약하게 하여 포수를 하고 다시 이것이 마른 후에 접시 등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바탕을 곱게 한다.(7) 마지막으로 입채(入彩) 과정이 있는데, 안료를 구비하여 채색이 잘 배합되도록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탱화가 완성된다.탱화를 제작하는 하는데 있어 재료의 불변성과 표현성은 작품의 보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중요한 요소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접착제로는 아교를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해초와 민어풀로 불려지는 어교(魚膠)등을 많이 쓰게 된다.전통적인 불화조성의 경우 채색은 크게 천연채색과 인조채색으로 구분한다. 천연에서 얻어지는 채색에는 석채(자연원석)와 수간(水干) 있다. 석채는 자연에서 얻은 원석을 분쇄한 후 수류· 정제하여 추출한 뒤 입자 크기별로 분류한 것을 말하며, 천연수간은 흙이나 진흙을 정제한 것이다. 인조석채는 산화금속물로부터 만들어 내는데 천연채색과는 달리 색상의 톤이나 그 종류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맣이 사용된다. 인조 수간물감은 화학안료를 정제하여 사용한다.2. 탱화배접 순서탱화배접하기(한지로)계보 한지를 합판에 대고 맑은 물로 큰 붓으로 묻혀서 젖게하여 그림의 규격에 맞게 바른 다음 두 번째는 적당히 배합된 풀로 4~5겹 붙인다. 풀칠하기(풀)계보 4~5겹 붙인 다음 풀칠을 잘하여 출초한 탱화를 붙인다. 천바탕(견사, 광목, 마직)계보 출초한 탱화초를 붙인 다음 마지막으로 천을 씌운다. 천을 씌운다(면직물)계보 천을 씌운 다음 붓으로 잘 다듬어 정리하면 끝나는 것이다. 아교물로(바탕색)계보 배접이 마른 다음 바탕색으로 포수를 한다. 탱화조성의 마무리(완성)계보 탱화개안 장면불모가 불사와 탱화를 완성하여 봉안하기까지도 형식과 틀에 의해 진행되기 마련인데, 이것을 의식이라 한다. 그것을 점안식, 봉불식, 봉안식이라 한다. 이렇게 의식을 하는 것은 부상과 탱화를 조성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신행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는 종교로서의 존재의미를 확인시켜주는 계기도 된다.◎전승계보유삼영 도원스님은 전통적으로 탱화를 배울 때 지금 서양화를 배우는 것과 달리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초본(草本)을 밑그림으로 사용하고 연마를 했다. 그것을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표현한다.스승과 공동으로 탱화의 제작 과정을 통해서 쉬운 작업부터 실력을 인정받으면 단계별로 어려운 작업에 참여하면서 연마하고 전수를 받는다. 스승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도제식 방법으로 기초를 익히고, 익힌 연수에 따라서 단계별로 어려운 것은 스승이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배운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되면 스승이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그린 그림을 스승은 그것을 입증하는 방식이다.탱화제작에 기본적인 필법을 익히고 배접과 아교의 농도, 바람질의 기법을 익힌 뒤에 운필의 흐름을 애기할 정도면 적게 잡아도 10여 년의 세월을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불교미술은 같은 계통으로 불상·불화·단청(佛像·佛畵·丹靑) 등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승속(僧俗)과 남녀(男女)를 통틀어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탱화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나라 불교 신앙의 대상과 그 신앙 내용을 도설화한 것이 탱화다. 그러므로 탱화의 내용은 곧 우리나라 불교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의미한다. 탱화가 가지는 가치와 역사성은 불교미술이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뛰어넘어 불교의 근본도리와 정신을 계승하고 현현(顯現) 시킨다는 데 있다. 문화나 역사, 전통이 가지는 힘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시대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우리나라의 탱화는 고려시대의 그림 일부와 조선시대에 제작되어진 다수의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통적인 재료사용과 제작기법은 몇몇 소신 있는 작가들에 의해서 겨우 명맥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일부 탱화작가들은 전통을 계승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편의성에 많이 치우쳐 있다고 한다. 탱화의 전승은 이러한 고려불화의 양식 및 조선불화의 전통기법과 채색을 바탕으로 계승·발전되어져야 할 것이다.유삼영 도원스님은 주제별 도상(圖上)에 필요한 초본으로 탱화를 조성하여 전통 불화의 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특히 필선(筆線)이 유려하고 구성과 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에 있어 석채(石彩)를 사용함으로써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유삼영 도원스님은 전통적인 재료사용과 제작기법을 계승하여 탱화를 그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탱화 제작기법과 가치를 저변에 널리 확대시켜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 ||
23 | 사기장 | 공예 | 사기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5-12-28 | 29 | 김제시 | 장동국 사기장은 옛 선인들의 생활상과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정신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긴 전통도자기공예와 더불어 우리나라 분청사기 예술문화의 전승을 위해 50여년 외길인생을 걸어오는 동안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분청사기의 진수 흑상감을 복원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창의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대내외적으로도 그 명성을 얻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분청사기의 기법인 상감, 인화, 박지기법에 있어 실제 기능을 원형대로 완벽하게 터득하여 재현에 성공했으며 이를 보전하고 있다.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전통자기 제작기법이 완성도 있게 전승된다면 국내는 물론 외국의 실수요자들의 구매욕구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문화자긍심을 높여주고, 국위선양에도 기여를 할 것이다. | 도기(陶器)에서 자기(瓷器)로의 발전은 매우 큰 문화적·기술적 변화였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제작할 수 있는 사기장들과 제작에 직접 필요한 재료인 자토, 유약, 그리고 가마 시설 등의 기반이 마련되어야만 자기(사기)의 제작이 가능한 것이었다.자기의 성립은 중국이 가장 빨라 기원전부터 당나라 말까지 점차로 발달하여 송대(10~13세기)에 와서 완성되었다. 근세에는 자토(磁土, 카올린)가 많은 경덕진요(景德鎭窯)를 중심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11~12세기 경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고화도의 경질도기와 저화도의 녹유도기가 제작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귀족들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중국 문물에 익숙해 있었으며 도당유학생과 선승들 역시 중국문물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기술이 유입되어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의 기술을 유입으로 고려시대에는 청자가 조선초기에는 분청사기, 조선후기에는 백자가 발전하였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사회로 옮겨가는 시기는 수많은 민란과 대원군의 쇄국정치 그 이후 일본, 서구 열강의 침투로 인한 격심한 변화로 식민지 시대까지 겪게 된다. 이 시기 도자는 대체로 19세기 전반의 백자의 전통을 답습하였다. 1876년 이후 일본의 산업화된 도자기들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일본의 왜 사기가 조선백자 대신 조선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하자 조선백자는 점차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근대 도자 제품의 확산에 따라 오랜 전통을 갖고 내려왔던 조선 도자는 그 전통이 단절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전통의 단절에서 20세기 후반인 오늘은 전통으로의 복귀와 새로운 한국 도자의 제작이라는 과제에 고심하고 있는 시기이다.그 중에서도 사기장 장동국이 전수하고 있는 분청사기는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조선 초기의 도자기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이 분장기법은 무늬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릇 표면을 백토로 씌워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모양은 고려 말 청자의 기형을 토대로 풍만하고 율동적인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안정감 있는 실용적인 모양이 많다. 또 장군·자라병·편병(扁甁)·매병(梅甁) 같은 특수한 모양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 발전하여 조선 태종 때 그 특색이 현저해져 15, 6세기 약 200여 년간 제작되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 무늬보다 백토분장이 주가 되어, 차츰 태토와 표면분장이 백자화되어 갔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제도상의 문제로 분청사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 사기장 장동국은 도자기의 고장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나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자랐다. 이러한 환경적인 요인에 자연스럽게 도자기와 연을 맺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도자기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기량과 역량이 출중한 유명도공들이 이천에 모여들면서 그들로부터 도자기 제작이나 조각기법을 사사받기에 충분한 기회도 주어졌다. 고려도요의 지순택을 시작으로 1970∼1972년에는 생산부에 1977∼1983년까지는 조각부에 있었고 광주요의 조소수 밑에서는 1972∼1977년, 해강도자의 유근영에게 1983∼1994년 조각실에 있으면서 전수받았다. 이 과정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제작할 때 필요한 조각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기술로 여주로 가서 1988년에 석천도예를 설립하게 되었고 1989년부터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호를 내건 토광도예를 설립하게 되었다.이천에서 나고 자란 장동국이 김제로 오게 된 배경은 우연히 전주에서 살던 송산 최명성 화백을 소개받아 전주에 반해 전라도에서 사기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진안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다. 그가 진안을 주목하게 된 배경은 최명성 화백과 마이산 관광을 왔다가 진안의 흙에 매료되어 2001년쯤 그곳에 자리잡았다. 진안의 한 폐교를 이용하여 혼자의 힘으로 문화예술촌을 구상하던 그는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고 이 시기에 당시 김제시장이었던 곽인희 전 시장의 권유로 2005년에 김제에 정착하게 되었다. 김제로 본거지고 옮기고 작품활동을 펼치면서 그때부터 현재까지 부량면 벽골제 아리랑문학과 내 도자기창작스튜디오 토광요 가마에 불을 지피며 자신의 작품활동과 학생들의 도자기 체험학습을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힘썼는데 2006년 토광도예를 설립했을 때 박재숙을 시작으로 김종희, 김종철, 김용우 등 5명을 전수자로 삼고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3. 전승내용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도기, 자기로 나누어지는데 백토 등이 혼합되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사기(자기)라 한다. 하나의 사기그릇이 제작되기까지 보통 8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로 사토를 채취하고 두 번째는 수비작업이다. 세 번째는 흙을 이기고 반죽하는 꼬박밀기이고 네 번째는 사발 등의 그릇을 성형하고 건조시키는 작업이다. 다섯 번째는 건조된 사발 등의 그릇 굽을 깎는 작업이다. 여섯 번째는 그릇의 초벌구이 작업이다. 일곱 번째는 유약을 만들어 그릇에 입히고 건조시키는 작업이다. 여덟 번째는 마지막 단계인 재벌구이 작업이다.전통 사기 그릇의 생산과정은 먼저 사토의 채취 및 수비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사기장 안동국은 주로 고령토를 이용하며 김제 백산이나 서해안의 뻘에서 소금기가 제거된 흙을 2-3년 전에 미리 채취해놓고 삭혀서 사용한다고 한다. 고령토를 사용하면 유리질화가 잘 촉진되고 강도가 높은 그릇을 제작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고령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질의 것으로 알려 져 있으며 매장량도 풍부하다. 이렇게 채취된 사토를 먼저 잘게 부수어 물에 넣은 다음 이를 휘젓고 그 뒷물을 받아 가라앉게 되는 미세한 흙가루르 받는 작업을 수비라고 한다. 이렇게 수비작업을 거쳐 준비된 흙은 다음으로 그릇 만드는 성형작업에 들어가게 된다.그릇을 성형하기 전에 흙을 다시 반죽하고 반죽된 흙을 알맞은 크기로 손질하여 물레 위에 가져다 놓는다. 사기장은 물레의 중심부에 맞추어 흙을 놓고 양손에 물을 묻혀 위로 쳐 올리듯 그릇을 빚는다. 이렇게 완성된 그릇을 굽을 잘라 나무판 위에 옮겨 높고 그늘에서 말린다. 다 말린 그릇의 밑바탕을 다시 깎아 다듬는 굽깍기 작업을 마무리 한다. 그 후 솔을 이용하여 그릇의 면을 털어 내고 다듬는다.이렇게 성형된 그릇은 적당히 말린 후 날을 책해 번조 작업에 들어간다. 초벌구이를 먼저 하게 되는데 800도 전후로 유약처리하여 구워내는 작업이다. 초벌구이를 하면 그릇의 색깔은 적갈색에 가까우며 물에 잘 흡수되는 상태로서 만져도 변형이 안된다. 그 다음으로 유약을 입혀 건조시킨다. 장동국이 사용하는 유약은 3년간 묵혀서 사용한다.마지막으로 재벌구이 과정을 거친다. 초벌구이 됫 그릇에 유약을 입힌 후 다시 가마로 들어간다. 온도가 1200도 이상에서 가열하면 장석유가 녹아내려 그릇표면에 씌워지고 골고루 유리질 막이 형성되면서 경질의 사기 그릇이 만들어진다. 가마의 번조 상태인 산화염이나 환원염의 상태에 따라 유약 속에 포함된 철분의 변화에 따라 색이 변화한다.장동국의 작품은 고려청자의 화려하고 아름답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비색을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현대적인 재해석이 담긴 문양을 입혀내는 등 작가의 혼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4. 전수교육 현황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2014년에 제 22회 대한민국 종합미술대전에서 명장의 칭호를 받고 도예문화 계승 발전을 위해 벽골제 창작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과거 선인들이 만들어 오던 전통자기(분청사기) 제작기법의 방식을 채택하여 전수하고 있다. 더불어 전수자들의 역량 향상에 따라 작업 공정에 관한 연구와 전승목표를 확실히 구분하여 요소별 기능개발을 시도하여 전수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 장동국 사기장은 옛 선인들의 생활상과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정신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긴 전통도자기공예와 더불어 우리나라 분청사기 예술문화의 전승을 위해 50여년 외길인생을 걸어오는 동안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분청사기의 진수 흑상감을 복원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창의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대내외적으로도 그 명성을 얻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분청사기의 기법인 상감, 인화, 박지기법에 있어 실제 기능을 원형대로 완벽하게 터득하여 재현에 성공했으며 이를 보전하고 있다.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전통자기 제작기법이 완성도 있게 전승된다면 국내는 물론 외국의 실수요자들의 구매욕구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문화자긍심을 높여주고, 국위선양에도 기여를 할 것이다. | ||
24 | 불교목조각장 | 공예 | 불교목조각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0-12-24 | 42 | 김제시 | 임성안 보유자는 전통목조각과 불교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불교목조각 전승자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은 현 상황에서, 그의 활동은 불교목조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불교목조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 사찰 건축과 불상등 불교의식과 관련된 조각들이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1,500년이 넘지만, 많은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전통 불교목조각기술의 계승과 보존은 더욱 중요성이 큰 실정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불교목조각을 전수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현재 김제시에는 예능 분야 전시관이 몇 군데 있지만, 기능 분야는 그렇지 못하다. 불교목조각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임성안이 문화재 보수 자격증 시험의 감독관을 맡아 시험장에 가보면 대목, 소목, 옻칠 등 다른 종목에는 응시자들의 수가 제법 많지만, 불교목조각 응시생들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불교목조각의 전승력이 매우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임성안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수관을 생각하고 있다. 전수관에서 교육, 전시, 판매 등을 통해 전통문화를 잇고, 한편으로는 목조각 장인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 불교 목조각의 전통적인 기술을 전수받아 이 일에 종사해온 장인 또는 그 기능을 가리킨다.목조각의 기법은 음각·부조·양각·투조·환조·음양각 등에 따라 각각 달라지고 사용되는 칼은 창칼·평칼·삼각칼·반원칼·원칼(둥근칼) 등이 있다.모든 나무가 목조각의 재료가 될 수는 있지만 향나무·전단 향나무·침향목·피나무 등이 주로 사용되며 작품의 소재에 따라 목재의 선택도 다르다. 같은 나무라도 부위에 따라 견고성·방향성·무늬·색깔이 서로 다르므로 불상을 제작할 때는 나무의 뿌리와 불상의 머리부분이 같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무는 거꾸로 세워야만 통풍이 잘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상같은 큰 작품을 조각할 때는 하나의 통나무로 할 수 없으므로 작은 나무를 접착제로 붙이고 조임틀을 이용하여 접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한국 목조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원건축과 불상조각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불교유물에 뛰어난 목조각 작품이 많다. 삼국시대의 목조각으로는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백제 관음상, 전라남도 송광사(松廣寺)의 목조 삼존불감(국보 42) 등이 있다.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경상북도 남장사(南長寺)에 있는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화(보물 922),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화(보물 923)가 있다.그밖에도 목조각으로 된 수많은 사찰과 불상, 불구가 이미 발굴되어 각종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계속 발굴되고 있다. | ◎ 전승내용 임성안은 조선불교미술의 맥인 금호 - 보응 - 일섭 - 우일스님의 계보를 이은 석운 허길량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사사받았다. 이후, 김진웅을 이수자로 받아 들였고, 현재는 임성안의 아들 임민수가 전수장학생으로 있다. 또한 유명희에게도 불교목조각을 전해주고 있다. 임성안 장인이 목조각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사찰에 자주 다니며 불상과 불교 장엄 문화에 친근감을 갖게 되었고, 부처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임성안 장인은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탁월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큰 형님은 “시골 살이 보다 소질을 살려 서울에 가서 제대로 기술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며, 1977년 임 장인을 한양목공예학원에 소개해 줬다. 학원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임 장인은 당시 호랑이 조각, 코끼리 조각 등 상품조각을 만드는 공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빨른 시간에 많은 양의 일을 배울 수는 있었지만, 그에게 상품조각을 만드는 일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 때 조각 일을 하는 선배가 “더 깊이가 있고 뜻있는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목불상 전문 공방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석운 허길량 선생을 만났다. 임 장인이 석운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1982년 3월의 일로, 그는 선생의 문하생 생활을 하며 불교 조각의 이론과 실기에 대한 학습을 기초부터 탄탄히 할 수 있었고, 문화재관리국에서 시행하는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 때 임 장인은 동물조각, 상품조각과 불교조각은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임 장인은 석운 선생과 함께 한 8년 동안 경주 대인사, 인천 지선사 등 전국 유명 사찰의 불상과 목 탱화 등 목 조각품들을 전통 조각기법으로 제작하여 봉안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 외에도 마산 관음사, 무주 안국사,백련사, 김제 금산사,귀신사, 장수 신광사, 완주 화암사,위봉사, 광주 원광사, 군산 은적사, 해남 대흥사 등 여러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임 장인은 1994년 자립해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가람불교조각원을 개원하고 독자적으로 불교 목 조각을 시작했다. 현재 임성안은 두 개의 작업공간을 갖고 있다. 한 곳은 김제에 처음 와서 정착한 곳이 한 곳이고, 다른 곳은 최근에 금산사 위쪽에 위치하는데, 사과 저장 창고를 개조한 것이다. 금산사 위쪽에 위치한 작업장에서는 크기가 큰 작품들을 제작하고, 다른 곳은 크기가 1미터 이하의 비교적 작은 작품들 중심이다. ◎ 전승현황 임성안은 1년에 2번 정도 전시회를 갖는다. 개인전은 열지 않고 그룹전 형태로 한다. 생계를 위한 불상제작과 전시를 위한 개인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기능인 협회, 전통조각회, 불교목조각회 등 5-6군데에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는데, 각 단체들로부터 전시회 출품을 요청받는다. 보통 3군데 이상의 단체로부터 전시 의뢰가 들어오지만 위와 같은 상황 때문에 1년에 2회 정도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다. 임성안은 전시회 외에도 김제시 내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부터 김제시 소재의 4군데 학교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방과후 교실이 아닌 정규 수업시간에 들어가 가르친다. 한 학교에 3번 나가게 되어 있다. 그 밖에 김제시 각 면단위에서 개최하는 면민의 날 행사나 김제문화원에 초청되어 작품전시를 하거나 체험행사를 열기도 한다. 현재 임성안을 거쳐간 이수자는 김진웅이다. 김진웅은 예전에 서울에서 임성안과 같이 작업하면서 알게 되었다. 임성안이 금산사에서 불교목조각을 하며 일손이 모자라자 김진웅을 데려와 함께 작업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김진웅은 임성안에게서 사사하게 되었다. 교육은 도제식으로, 일과 교육을 병행하며 사사했다. 임성안은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 목조각을 김진웅에게 맡기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돕고 있고, 지속적으로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임성안의 아들 임민수는 한남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는 학생이다. 현재는 휴학하고 군에 입대해서, 김제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근무 중이다. 임민수는 집에서 출퇴근하며, 저녁이나 주말(토요일, 일요일)에 작업장에서 조소와 목조각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임성안은 유명희에게도 불교목조각을 가르치는데, 다른 전수자들과 같이 일주일에 2-3일, 하루에 4-5시간 가량 교육을 받는다. 일정하게 정기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교육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합해보면 평균적으로 저 정도가 된다. 김진웅은 작품이나 기술 수준이 거의 완숙단계에 있고, 유명희와 임민수는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 임성안 보유자는 전통목조각과 불교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불교목조각 전승자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은 현 상황에서, 그의 활동은 불교목조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불교목조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 사찰 건축과 불상등 불교의식과 관련된 조각들이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1,500년이 넘지만, 많은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어 전통 불교목조각기술의 계승과 보존은 더욱 중요성이 큰 실정이다.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불교목조각을 전수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현재 김제시에는 예능 분야 전시관이 몇 군데 있지만, 기능 분야는 그렇지 못하다. 불교목조각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임성안이 문화재 보수 자격증 시험의 감독관을 맡아 시험장에 가보면 대목, 소목, 옻칠 등 다른 종목에는 응시자들의 수가 제법 많지만, 불교목조각 응시생들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불교목조각의 전승력이 매우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임성안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수관을 생각하고 있다. 전수관에서 교육, 전시, 판매 등을 통해 전통문화를 잇고, 한편으로는 목조각 장인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한다. | ||
25 | 부거리 옹기장 | 공예 | 옹기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5-12-28 | 53 | 김제시 | 안시성 보유자가 전승하고 있는 쳇바퀴 태렴으로 판장질하는 제작기법은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기술이다. 그의 소박한 수화문양에는 향토적인 미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옹기는 오랜 시간 한국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옹기장들 사이에는 옹기 성형을 제대로 배우려면 보통 3년은 걸린다고 하여 ‘삼년 공밥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옹기제작 중에서 특히 옹기 성형기술은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전통 음식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옹기에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예술미과 전통지식이 집적되어 있다. 이러한 유산이 잘 전승될 수 있도록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 조선시대 국가의 운영을 규정한 『경국대전』에서 옹기장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조 중앙관서에 예속된 경공장 중에 옹기장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각 부서에서 옹기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지방의 옹기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기장과 옹기장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기와 옹기의 경우 협업을 통하여 생산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흙이나 화목과 같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모이다보니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이곳 부거리 부창마을은 김제 시내에서 멀지않고 주위에서 점토와 화목을 구하기 쉬운 지역으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의 자립에 의해 공방이 설립되었으며 이 공방 외에도 6개의 가마가 있었다. 아직도 이곳에는 점토대가 형성되어 있기는 하나 산의 밑부분 퇴적측에서 나오므로 불심이 약해 10여년 전부터 황상지역에서 사다 Tm고 있으며 가마의 길이는 23m로 부창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마이다.기계 시설이 없었던 과거에는 옹기 제작의 모든 공정이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다. 자연히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옹기를제작하였고, 각자의 역할이 일정하게 분담되어 있었다. 옹기점의 인적조직은 지역이나 옹기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인과 대장, 건아꾼을 기본 구성으로 하며 상황에 따라 생질꾼, 수비꾼 등이 더해진다. | 안시성의 스승 변동순(1935∼2001)은 세례를 받은 천주교신자로 그의 아버지와 옹기를 하다가 임실, 전남 곡성 옹기촌을 거쳐 1968년 12월에 전북 김제 백산면 부거리 부창마을에 들어와 옹기를 만들었다. 변동순 선생은 쳇바퀴태렴에 능숙하였고 손그림을 잘 그렸다. 1980년 이후 옹기의 쇠퇴기가 와도 변동순만이 옹기 가마와 작업장을 지켰고 안시성이 1992년도에 부거리 옹기마을에 들어와 그로부터 전라도 쳇바퀴태렴 기법을 전수받고 지금까지 전통옹기 작업에 종사하며 전통옹기 계승과 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안시성은 원광대 도예학과를 졸업하기 전인 1990년에 변동순의 제자로 들어왔고 이후 안시성은 변동순과 함께 기거하며 전과정에 걸쳐 전수받고 1995년에 옹기막을 인수하였다. 현재는 김태희, 이선미, 김진용에게 전수하고 있다.◎ 전승내용옹기는 성형기법과 형태에서 지역적 차이가 드러난다. 성형기법은 옹기제작에 사용하는 흙을 가래떡 형태로 둥글게 만든 흙가래(질가래)를 쓰든가, 흙을 넓게 펴서 만든 타래미를 사용하든가에 따라서 구분된다. 또한 흙가래를 사용하되 쌓아 올라가는 방식에 따라서 지역적 구분이 이루어진다. 옹기의 형태는 아가리와 바닥크기의 상대적 비율과 배가 나온 정도에서 지역적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에서는 점토를 가래떡처럼 둥글게 만들어 옹기를 성형하며 이것을 타림, 통타림, 배기태림 등으로 부른다. 타림이라는 것은 타리다는 말이 변형된 것이다. 가장 일반화된 기법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할 필요 없이 타리는 행위자체를 자칭하는 말인 타림이라고 한다.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에서는 점토를 넓게 늘려 만든 타래미로 옹기를 성형하는 쳇바퀴대렴기법을 사용한다. 쳇바퀴태렴이란 옹기를 타래미를 이어붙인 모양이 마치 체의 몸체가 되는 쳇바퀴와 비슷하다고 불여진 명칭이다. 쳇바퀴태렴의 장점은 다른 성형 기법보다 제작 속도가 빠르고 힘이 적게 든다는 점에 있다. 안시성이 쳇바퀴 태렴으로 판장질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만의 방법이다. 이 독특한 방법 때문에 우리나라 옹기가 고유성을 인정받고 있다.부거리 옹기는 쳇바퀴태렴기법으로써 어깨가 넓고 밑이 좁아 풍만한 느낌을 주는 특징이 있으며 풍부한 곡식과 장을 저장하기 위해 큰 항아리를 제작하고 있으며 풍만하고 넓은면에 대담하고 큰 손놀림의 그림을 많이 그리고 있다.별도의 도구를 쓰지 않고 엄지손가락이나 다섯 손가락으로 옹기에다 무늬를 나타내는 수화문양법으로 다양하면서도 힘에 찬 느낌을 표현한다. 옹기에서 이러한 문양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기물에 휘돌아 가는 선이 곡성적인 형태미를 자아내기 때문이다.수화의 문양은 옹기에서만 사용하며 기물의 상하부에 형태와 어울러서 위로 뻗친 난초꼴, 나비꼴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기물의 중간부분에 곡선의 집합을 만들고 있는 것도 있다. 또 손의 휘놀림으로 표현된 선이 불꽃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이러한 수화 문양들은 추상적인 표현이라 하겠다.주로 전라도 옹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파도문을 주로 그렸으며 게문, 용수 철문 등도 표현하였다. 안시성은 옹기에 그려진 수화문양은 소박하지만 자유로이 장인들에 의해 그들만의 정서면을 추구, 표현하는 마음을 엿 볼 수 있으며 또한 향토적 토속적인 미의 순수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전수교육 현황옹기장 안시성은 군산대와 한국전통문화대에 출강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현재 세명의 제자 중에서 김진용에게 중점하여 전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전수교육보다 전수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 옹기 작업장과 부거리 가마의 옛모습 복원에 힘쓰고 있다. 특히 부거리 가마는 부거리 옹기마을에 존재했던 6개 가마 중에서 현재까지 옹기가마와 작업장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고 등록문화재 제 403호로 지정받았다.직접 장작을 피워 사용하는 전통 방식의 가마로, 구릉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가마가 놓일 자리를 마련하고 전통적인 수제 흙벽돌을 쌓아 가마를 구축하였다. 측면 구멍을 통하여 불을 땔 수 있어 가마 전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으며 긴 형태의 가마임에도 균일하게 굽기가 가능하다.부거리 옹기가마는 길이가 22.5미터, 넓이가 1.0미터, 높이가 1.6미터, 면적 124㎡의 통가마 형식으로 직접 장작을 피우며 사용하는 전통방식을 유지하고 있다.안시성은 이 부거리 옹기가마를 복원해서 문화재로 지정받는데 일조하였으며 현재는 그가 소유하고 관리하며 사용하고 있다. 큰 가마를 작업할 때는 부거리 옹기가마를 사용하고 바로 옆에 전통 가마를 하나 더 제작해서 개인 작업을 하거나 작은 작업을 할 때는 옆 가마를 사용한다고 한다.옹기 성형 기술을 배우는 동안에는 옹기점에서 품삯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은 옹기를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옹기점의 전성기가 1970년 이후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면서 옹기 소비가 줄어들어 옹기 기술 전승에 큰 위기를 겪는다.이런 상황에서 현재 옹기장들은 과거와 달리 주인 일부터 건아꾼 일까지 모두 소화해야만 한다. 또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는 대장들의 나이가 70-80대로 고령화 현상이 심각하다. 게다가 독처럼 큰 옹기를 성형하는 것은 기술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많은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배우려는 의지가 크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다. | 안시성 보유자가 전승하고 있는 쳇바퀴 태렴으로 판장질하는 제작기법은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기술이다. 그의 소박한 수화문양에는 향토적인 미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옹기는 오랜 시간 한국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옹기장들 사이에는 옹기 성형을 제대로 배우려면 보통 3년은 걸린다고 하여 ‘삼년 공밥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옹기제작 중에서 특히 옹기 성형기술은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우리의 전통 음식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옹기에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예술미과 전통지식이 집적되어 있다. 이러한 유산이 잘 전승될 수 있도록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 ||
26 | 남원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1998-01-09 | 7 | 남원시 | 남원농악은 호남 동부 평야 지역의 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으로서, 좌도농악의 특징을 가지면서 예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까지 다다른 농악이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 전체적으로 마을농악의 단계에서 벗어나 좀더 발전하여 걸립농악의 단계를 거쳐 ‘포장걸립농악’ 곧 연예농악의 단계에까지 발전한, 매우 전문적인 농악의 형태로 구축된 농악이다. 둘째 : 다른 농악과는 달리 판굿의 짜임/판제가 크게 앞굿/‘초굿’과 뒷굿/‘후굿’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으며, 이 중에 음악적인 ‘앞굿’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연희적인 ‘뒷굿’도 대등하게 중요시 한다. 셋째 : 치배들의 ‘윗놀음’이 호남좌도 농악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가장 수준 높은 단계에까지 발달되어 있다. 넷째 : 좌도농악의 기조와 판제를 분명하게 지키면서도 여러 면에서즉 가락과 진법과 놀음새 면에서 볼 때, 호남 좌도농악 중에서 비교적 가장 세련된 경지에 도달한 농악이다. 예컨대, 가락 면에서 보아도 가락이 분명하고 느린가락과 빠른가락이 뚜렷하면서도 그 변주가 매우 다양하다. 호남지역의 연예농악은 서구의 문화예술이 급격하게 유입된 개화기에 싹 트기 시작하여 해방 이후에 왕성한 절정기를 맞았으나 산업화의 격랑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남원농악은 마을농악이 걸립농악으로 발전하고 다시 연예농악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다. | 2014-11-28 | 현재의 남원농악은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독우물)의 마을농악이 연예화한 것을 일컫는 것이다. 남원농악은 마을을 벗어난 농악이 여러 고을을 규합하여 통일된 공연텍스트를 이루고 다시 제 고을인 남원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 때의 남원농악은 연예농악으로 발전한 농악이며 마을농악의 층위로 돌아가지 않는다.그것은 공연자의 활동 범위와 관객의 폭이 넓어짐을 의미하며 실제로 그것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었다. 남원농악이 여전히 남원농악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변화과정을 전제로 할 때, 남원농악이라는 용어는 그 의미의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치배 편성 기수, 앞치배, 뒷치배로 구성된다. 기수: 단체기 1, 농기 1, 영기 2 앞치배: 쇠 6, 징 4, 장고 8, 북 6, 채상소고 14, 새납 1 잡색: 대포수, 양반, 할멈, 각시, 조리중, 창부, 한량 | ◎ 전승내용남원농악은 공연 유형에 따라 마당밟이굿, 걸립굿, 두레굿, 판굿 및 연예굿으로 분류된다. 두레굿과 마당밟이굿은 마을굿 층위의 공연이며 걸립굿은 농악대가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원정을 나가 공연하는 것이다. 판굿은 마을굿패이나 걸립패의 공연에도 쓰였지만 연예화된 포장걸립패의 주요 레퍼토리로 사용되었다.남원농악 판굿은 전굿과 후굿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굿은 앞굿으로 어울림굿, 질굿, 풍류굿, 채굿, 진풀이굿, 호호굿, 영산굿, 노래굿, 춤굿, 등지기굿, 미지기굿으로 진행된다. 전굿에서는 화려한 변주 장단과 능란한 몸놀림 그리고 좌도농악 특유의 상모놀이가 청관중을 사로잡는다.후굿은 뒷굿으로 도둑잽이, 문굿, 점호굿, 헤침굿, 인사굿으로 주로 춤과 대담, 연기, 진풀이로 구성되어 있어 전굿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후굿에서는 농악의 다양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농악의 연예적 성격이 강한 전굿과 달리 후굿은 전문농악으로 발전하기 전의 마을굿 형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도둑잽이에서 나타나는 마당극 형식의 재담과 상여소리 등 연극과 민요가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또 문굿, 점호굿 등은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식적인 절차를 나타내고 있어 결국 호남 전문농악인 집단의 예술적 뿌리가 농경사회에 기반한 마을굿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1980년대에는 류명철의 농악계 은퇴로 인해서 남원지역의 농악은 얼마 동안 공백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임실 필봉농악의 상쇠 양순용이 남원으로 이주해 와서 한동안 임실 필봉농악이 번성하게 된다. 1994년에 상쇠 류명철이 다시 본격적인 농악 활동을 시작하고 1995년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양순용이 서거하였다.1997년 남원농악보존회가 창립되고 1998년 류명철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다시 독우물굿의 계보가 남원의 주도적인 농악으로 되었다. 1999년에는 남원시립농악단이 창단되고 동시에 남원농악전수관이 개관을 하여 류명철은 남원시립농악단의 부단장과 남원농악전수관장을 맡는다. 남원시의 재정지원과 남원시립농악단의 강습 지원에 힘입어 남원시 23개 읍, 면, 동에 농악단이 창단되기 시작하여 2001년에 이르러 전 지역에 창단이 완료되었다.또한 남원농악의 효과적인 전승활동을 위해 대학생 및 농악동호인 단체 합숙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회원들의 예능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매주 금요일 보유자의 지도아래 전체연습을 실시하고 있다.◎전승계보남원농악의 계보는 상쇠 류한준 옹으로부터 다시 같은 마을의 제자 강태문 옹(1903-1965)에게로 이어졌으며 강태문 옹으로부터 다시 상쇠 류한준 옹의 친자제인 류명철(현 남원농악 상쇠)선생에게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현재 전승되고 있는 남원농악의 중심 계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① 남원 독우물굿 → ② 남원 독우물굿 + 전판이굿 → ③ 유한준굿 → ④ 강태문굿 → ⑤ 류명철굿이렇게 발전된 ‘남원농악’은 그 후 류한준, 강태문의 사망과 시대적인 변화로 인해 침체기를 걷다가 1994년 류명철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97년 남원농악 보존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9에는 남원시립농악단이 창단되어 류명철 선생이 부단장으로 취임하면서 남원농악이 다시 올바른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 계보가 튼실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 남원농악은 호남 동부 평야 지역의 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으로서, 좌도농악의 특징을 가지면서 예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까지 다다른 농악이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다.첫째 : 전체적으로 마을농악의 단계에서 벗어나 좀더 발전하여 걸립농악의 단계를 거쳐 ‘포장걸립농악’ 곧 연예농악의 단계에까지 발전한, 매우 전문적인 농악의 형태로 구축된 농악이다.둘째 : 다른 농악과는 달리 판굿의 짜임/판제가 크게 앞굿/‘초굿’과 뒷굿/‘후굿’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으며, 이 중에 음악적인 ‘앞굿’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연희적인 ‘뒷굿’도 대등하게 중요시 한다. 셋째 : 치배들의 ‘윗놀음’이 호남좌도 농악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 가장 수준 높은 단계에까지 발달되어 있다. 넷째 : 좌도농악의 기조와 판제를 분명하게 지키면서도 여러 면에서즉 가락과 진법과 놀음새 면에서 볼 때, 호남 좌도농악 중에서 비교적 가장 세련된 경지에 도달한 농악이다. 예컨대, 가락 면에서 보아도 가락이 분명하고 느린가락과 빠른가락이 뚜렷하면서도 그 변주가 매우 다양하다.호남지역의 연예농악은 서구의 문화예술이 급격하게 유입된 개화기에 싹 트기 시작하여 해방 이후에 왕성한 절정기를 맞았으나 산업화의 격랑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남원농악은 마을농악이 걸립농악으로 발전하고 다시 연예농악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다. | |
27 | 목기장 | 공예 | 목기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1997-12-04 | 11 | 남원시 | 남원목기의 명성은 이미 대중화되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원 목기 사업의 호황은 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식 화약성분인 카슈 사용으로 옻칠공예의 전통성이 단절된 것과 함께, 기계(로그로)가 도입되어 목기산업의흥행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전통 목공이 단절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요즘은 옻칠 공방에서 백골제작을 병행하고 있거나 기계 주문으로 만들어진 목기를 사용하고 있다. | 남원의 목기는 특유의 향기와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 단단한 나무 재질, 벗겨지지 않는 옻칠로 일찍부터 유명한 지역특산품이 되었다. 남원 목기산업은 합성수지제품에 밀려 잠시 퇴조하였지만, 천연제품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남원 목기의 역사는 한때 승려가 3천여 명이 넘었던 신라의 고찰이자 대가람인 실상사 승려들로부터 주민들이 바리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더구나 실상사가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은 산이 깊고 넓어 다양한 수종이 있어 목기의 질 좋은 원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이 남원을 한국 최고의 목기 산업의 메카로 발전하게 하였다.철제와 프라스틱 제품이 보편화되기 전에 주로 목기로 만든 생활 도구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가 일상사였던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남원 목기는 생활 도구뿐만 아니라 제기·불교용품 등의 수요를 감당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남원 목기는 독특한 향과 함께 모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목기 자체가 단단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원 목기는 옛날부터 왕실에 진상하는 진상품이었으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궁궐에서 사용한 제기는 모두 남원 목기였다.목기는 소리가 나지 않고 질감이 풍부하고 정갈한 맛이 있으므로 엄숙한 분위기를 필요로 하는 제사나 사찰에서의 각종 행사에 잘 어울리는 도구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목재로 목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목기 표면에 옻칠을 하지 않으면 목기의 내구성이 약해 갈라지거나 변색되는 약점이 있다. 남원 목기가 오랫동안 목기 업계에서 지존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원 장인들의 옻칠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 노동식씨는 1939년 이 곳에서 태어나 <남원목기공예사>를 설립하여 전통목기의 맥을 잇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1987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하여, 1994년 전통공예대전 입선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쌓았다. | 남원목기의 명성은 이미 대중화되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원 목기 사업의 호황은 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식 화약성분인 카슈 사용으로 옻칠공예의 전통성이 단절된 것과 함께, 기계(로그로)가 도입되어 목기산업의 흥행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전통 목공이 단절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요즘은 옻칠 공방에서 백골제작을 병행하고 있거나 기계 주문으로 만들어진 목기를 사용하고 있다. | ||
28 | 옻칠장 | 공예 | 옻칠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1999-10-08 | 13 | 남원시 | 김영돌 장인은 13살때부터 강원도 원주 산골에서 옻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부터 칠하는 과정을 모두 배운 사람이다. 생칠을 채취하고 보관하고 구분하는 방법,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바릿떼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장인의 의견으로는 바릿떼 제작은 찬합만큼이나 정교한 솜씨가 필요하다고 한다. 바릿떼는 원시적이며 원형적인 식기형태다. 현실적으로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독특한 제작방법을 기록해야 한다. 옻칠 공예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원금의 출처를 제대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지원금을 유용하거나 작품 활동과 무관한 곳에 사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형식적인 지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과 관리가 필요하다. 생칠은 ‘칠’을 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현재 옻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없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생칠작업을 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장인의 건의로 칠을 내는 사람들을 문화재로 지정받게도 했지만 현재 묘목이 너무 어려서 갈수록 토종 옻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옻이 지니고 있는 효능이나 가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옻나무와 연관된 장인들을 정책적으로 보호육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영돌은 도제식 교육의 산 증인이다. 본인은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 체화화된 전통지식을 지니고 있다. 남원의 목기문화의 산증인이자 옻칠장의 전 영역에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실제 작업을 내놓은 지 3년 정도가 된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김영돌 장인의 구술생애사를 기록하여 남원 목기와 옻칠장인의 세대전승을 위한 기초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 옻나무는 중국 또는 인도 티베트 지방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주로 칠액으로 이용되고, 옻나무의 종자에는 왁스(wax)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채취하여 목랍을 만든다. 옻나무의 목재는 가볍고 무늬가 곱기 때문에 가구재료나 부목浮木으로도 이용된다.(김종덕: 2012)옻칠장은 생칠과 정제칠이 있다. 생칠은 생나무에서 옻을 직접 채취하여 그것을 원료로 삼는 것을 말한다. 정제칠은 생칠을 가열하여 불필요한 수분을 증발시켜 옻을 가공한 것을 말한다. 현재 강원도 무형문화재에는 칠정제장도 지정을 받았다. 옻나무의 특성을 활용하여 옻칠, 옻정제, 옻타는 장인 등으로 분화된 것이다. | ◎전승내용 13세에 인월에 사는 강인권 선생에게서 배움을 시작했다. 집이 가난하여 숙식을 해결하며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사포질을 하며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피묻은 손으로 칠을 배웠다고 한다. 강인권의 공장은 일반 목기공장으로 밥통에서부터 찬합까지 생활용품 전반을 다루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일본인들은 지리산 일대를 자기 맘대로 벌목해서 나무를 베어다가 칠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칠은 강원도 원주와 북한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사시사철 나오는 열대쪽 옻과 강원도 원주의 옻의 질적인 차이가 명확하다고 한다.좋은 옻은 추운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재 들어오고 있는 중국산도 추운 곳에서 나오는 옻이 좋다. 가격차이도 일반적인 옻은 40kg에 8만원이라면 원주산은 200여만원으로 그 가격차이가 크다.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은 값어치있게 만들어서 돈을 많이 받는 것이다. ‘지랄’같이 만들어서 비싸게 받으면 안된다라고 배웠다. 특히 바릿떼는 스님들이 음식을 직접 담아먹는 것이기 때문에 화학성분이나 불순한 요소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실제 문화재로 지정받기 이전에는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본인이 제작한 바릿떼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20여년 전국의 사찰을 모두 돌아다니며 숙식도 해결했는데, 사찰음식이야말로 전통음식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스승과 함께 강원도 꼴짜기 가서 옻나무를 사서 직접 칠을 내곤 했다. 시기는 추석 지나고 추워질 때까지 2-3개월이었다. 산속에서 움막을 짓고 칠을 낼 때, 호랑이를 본 일화도 기억하고 있다. 칠의 종류는 세 가지다. 첫째는성한 나무에서 세워서 나온 성칠(생칠)(성하다)이고, 둘째는 불에 구어서 나온 화칠(수분이 없어서 좋은 칠이다), 셋째는 가지에서 나온 가칠(나무 가지에서 나온 칠은 검은 색, 멀겋다) 생칠과 화칠을 섞어서 단지에 넣어두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열이 많기 때문에 거품이 올라오는 것이다. 밤새 잠을 자지 않으면서 일어나서 저어줘야 좋은 칠이 나온다. 수시로 저어 줘야하기 때문에, 스승이 없는 동안에도 자며 깨며 칠을 저었다고 한다. 아래는 스승이 돌아가실 때 물려준 연장이다.옻칠공예에서 일본사람들이 알려준 것이 있다고 한다. 나무는 갈라지는 것이 원칙이다. 수분을 흡수하거나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갈라지는 것이다. 이때 일본사람들이 바릿떼와 같은 홈을 메우는 기법을 알려준 것이 있다. 톱밥보다 더 가늘게 만들어진 나무가루를 칠과 버물려 홈을 메우는 것이다. 이외에 삼베를 바르고 칠을 하는 것이 나무가 뒤틀리거나 홈을 메우는데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배제대학교에서 옻칠공예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그 방법을 전수하곤 했다.현재 강원도 원주에서 파는 옻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 밀가루, 땡감에서 나온 즙 등을 섞어 옻이라고 팔지만 그런 불순물이 섞인 원료는 시간이 지나면 썩는다. 참옻은 시간이 지나도 섞지 않고 구린내가 나는 것이 다르다. ◎전수교육이수자를 구하는 문제는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권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던 큰 아들을 불러와 자신의 가업을 잇게 하고 있다. 이수자 김환옥은 지정을 받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아영에 있는 장인의 저택에는 본인이 평생 사용했던 건조장과 작업실이 남아있다. 현재 공방은 남원시내에 위치해 있어서 이수자 김환옥이 작업을 하고 있다. | 김영돌 장인은 13살때부터 강원도 원주 산골에서 옻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부터 칠하는 과정을 모두 배운 사람이다. 생칠을 채취하고 보관하고 구분하는 방법,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바릿떼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장인의 의견으로는 바릿떼 제작은 찬합만큼이나 정교한 솜씨가 필요하다고 한다. 바릿떼는 원시적이며 원형적인 식기형태다. 현실적으로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독특한 제작방법을 기록해야 한다.옻칠 공예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원금의 출처를 제대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지원금을 유용하거나 작품 활동과 무관한 곳에 사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형식적인 지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과 관리가 필요하다.생칠은 ‘칠’을 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현재 옻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없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생칠작업을 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장인의 건의로 칠을 내는 사람들을 문화재로 지정받게도 했지만 현재 묘목이 너무 어려서 갈수록 토종 옻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옻이 지니고 있는 효능이나 가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옻나무와 연관된 장인들을 정책적으로 보호육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김영돌은 도제식 교육의 산 증인이다. 본인은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 체화화된 전통지식을 지니고 있다. 남원의 목기문화의 산증인이자 옻칠장의 전 영역에 다양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실제 작업을 내놓은 지 3년 정도가 된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김영돌 장인의 구술생애사를 기록하여 남원 목기와 옻칠장인의 세대전승을 위한 기초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 ||
29 | 백동연죽장 | 공예 | 백동연죽장 | 국가무형문화재 | 1993-07-05 | 65 | 남원시 | 연죽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신분을 드러내고, 부를 과시하는 데 쓰인 사치품이었다. 오늘날 흡연자들 중 연죽을 이용하여 담배를 피우는 이는 극히 드물다. 연죽이 실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이기에 소비되는 시대는 지났다. 담뱃대는 이제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예품으로 기능한다. 시대의 변화로 백동연죽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도 점차 줄었지만 5대째 이 기술을 가족 내에서 전승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황영보의 집안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하게 연죽장으로 일가를 이룬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특히 황영보의 일가는 장식용 오동의 특이한 배합법으로 유명하다. | 백동연죽은 백동(白銅, 보통 구리, 아연, 니켈의 합금을 말함)으로 만든 담뱃대[연죽, 煙竹]를 말한다. 백동연죽장은 이를 만드는 기술과 장인을 부르는 말이다. 담뱃대 가운데서도 장죽(長竹)은 조선시대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이다. 금과 은, 동, 백동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겉 장식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한편 평민들은 길이가 긴 장죽보다는 짧은 곰방대를 주로 사용했다. 연죽의 제작상황은 1921년 연초전매제 실시, 태평양 전쟁 시기 금속재료의 공출 등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또한 필터 담배가 보급된 1970년대부터는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담뱃대는 장식이 화려한 연죽과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죽으로도 구분한다. 민죽과 달리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운 연죽은 여러 상징적 무늬들을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쓰는 이의 신분과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 국가무형문화재 65호인 황영보는 남원시에 거주하고 있다. 계보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조부 때부터 시작하여 손자 황인준까지 5대째 전통 담뱃대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잇고 있다. 황영보 선생은 13세 때 처음으로 부친에게 제작 기술을 배워 고령인 현재까지도 이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황영보 선생은 1932년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인 황용구에게 도제식으로 연죽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가 살았던 왕정동 일대는 예부터 산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까지도 많은 주민이 담뱃대를 만들던 마을이었으나 신식 담배가 나오자 연죽을 만드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황영보의 가족들이 유일하게 백동연죽의 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황영보의 이력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80년 전라북도 산업디자인전람회 입선, 1984년 전국 공예품 경진 대회 특선 및 전승 공예 대전 입선, 1986년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 대회 입선 등 많은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1993년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67호 백동연죽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솜씨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똑같은 담뱃대도 남들이 만든 것은 천원에 팔렸고, 황영보의 담뱃대는 2,500원에 팔릴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그는 남원의 춘향테마파크 앞 민속촌 내에서 기능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다. 아들인 황기조와 자부 박성분은 그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그만의 기술을 잘 전수한 제자이다. 황영보 선생의 가족들은 5대에 걸쳐 백동연죽장의 전통기술을 전승해오고 있다.황영보 선생이 만드는 백동연죽은 물부리(연기를 입으로 빨아들이는 부위), 대꼬바리(담배를 담아 태우는 부위), 설대(이 둘을 잇는 부위)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대꼬바리 부위는 뜨거운 열을 받는 쪽이어서 파손되기 쉬우므로 주로 구리나 놋쇠, 백동 등의 재료로 제작한다. 그에 비해 물부리 부분은 금속재료뿐만이 아닌 옥이나 상아, 쇠뿔 등의 다양한 재료를 자유롭게 쓰기도 한다.여러 담뱃대 중 백동연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백동합금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백동연죽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속을 녹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황영보의 경우 니켈 10%, 아연 12%, 동 78%(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합금하기도 한다. 니켈의 함유량이 높으면 더 하얀 색이 나타난다)의 비율로 합금하여 강한 불에서 녹이는데, 니켈은 1,600도가 되어야 겨우 녹기 때문에 불의 온도는 1,800이나 1,900도로 맞춘다. 이처럼 고온에서 금속이 모두 녹는 데에는 30여분이 걸린다.황영보는 합금된 백동을 수도 없이 두들겨 담뱃잎을 넣는 부위인 대통을 만든다. 이때 망치와 정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두드리는데 차차 반원 모양을 만들어 나간다. 백동 두드리는 과정이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대꼬바리 부위는 대통 외에도 목도리와 토리 부분으로 구성된다. 대통이 머리고 설대가 몸통이라면 목도리는 마치 목 같은 곳이다. 토리는 설대와 목도리를 연결하는 부위를 말한다. 토리 부위에는 백동연죽의 미적인 부분을 극대화시키는 아름다운 문양들이 장식된다. 수(壽), 복(福), 희(喜) 등의 문자 디자인을 음각하거나 압출(壓出)한다. 구름, 소나무, 학 등의 문양을 넣기도 한다.설대는 담뱃대를 사용하는 사람이 주로 손으로 잡게 되는 부위이다. 대나무로 만드는데 오죽, 산죽 등을 주로 이용한다. 검은색을 띠는 오죽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는 하나 이를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설대에 낙죽을 하여 무늬를 내거나 염색, 조각 기술을 활용하여 장식한다. | 연죽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신분을 드러내고, 부를 과시하는 데 쓰인 사치품이었다. 오늘날 흡연자들 중 연죽을 이용하여 담배를 피우는 이는 극히 드물다. 연죽이 실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이기에 소비되는 시대는 지났다. 담뱃대는 이제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예품으로 기능한다. 시대의 변화로 백동연죽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도 점차 줄었지만 5대째 이 기술을 가족 내에서 전승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황영보의 집안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하게 연죽장으로 일가를 이룬 독특한 이력을 갖는다. 특히 황영보의 일가는 장식용 오동의 특이한 배합법으로 유명하다. | ||
30 | 무주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놀이 | 놀이 | 무주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놀이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0-05-28 | 41 | 무주군 |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남녀노소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놀이다. 주로 여성주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단골이 주재하는 주술적 액막이에 남성의 유교적 당산제가 함께 이루어지는 특징이 있다. 제의와 더불어 노래, 춤, 그리고 사설로 이어지는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종합예술이다. 특히 지역 문화사 측면에서 여성 제의로서의 예술성과 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다. 마을춤이란 공동 생활권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춤이다. 또한 지역의 강한 공동체성, 제의성, 생산성, 오락적인 축제성을 갖춘 해당 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이 스며든 춤이다. 부남 지역의 춤은 노래와 놀이가 적절히 안배된 종합적인 마을 축제를 통해 보전되고 있다. 부남디딜방아액막이 놀이는 평지가 아닌 가파른 산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박자가 느리다. 화순, 김제와 같은 평야지역의 유사한 놀이와는 차이가 있다. 동아줄을 묶어서 디딜방아를 이동시키는 것 역시 부남 지역의 특징이며 가치이다. | 무주군 부남면에서는 정월 밤이 되면 마을 아낙네들이 한데 모여 이웃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쳤다. 이 훔친 방아를 메고 노래 부르며 마을로 돌아온 후에는 디딜방아에 속옷을 걸어두어 액을 풀어내었다.무주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놀이(방앗거리놀이)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원로들의 증언과 추정에 의해 약 250년 전(1750년경)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과거 마을에 큰 전염병이 퍼지게 되자 이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전래되어 오던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를 행하여 큰 효험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필요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행해왔던 놀이를 해마다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향촌제(鄕村祭) 형식의 마을 축제로 받아들여 전승되고 있다.6· 25 전쟁과 60~70년대 새마을 운동 및 산업화·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무주군 부남면 민속놀이도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현 보존회장 유재두와 마을 유지들의 많은 노력으로 1996년 보존회가 결성되면서 복원되어 민속놀이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현재 대소리 대소마을, 유평마을, 유동마을, 교동 마을을 중심으로 보존회원 80여명이 전승하고 있다. 2000년 제41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전북대표로 참가하여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민속행사와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아 마침내 2010년 5월 28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이후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매년 정기적으로 정월 대보름날 대대적인 민속축제로 행하고 있다. 그리고 부남면 면민의 날, 무주의 반딧불축제 등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하여 전통놀이를 시연하고 있다. | ◎ 전승내용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디딜방아에 여자의 속곳 등을 걸쳐 액을 막고자 기원하는 무속적 제의로 여성중심으로 행해지며 전라도의 순천·나주, 경상도의 산청·합천, 충청도의 대전·대덕·금산·공주 등지에서 널리 행해졌다. 무주군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행하지만 무주의 지형적인 특색으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성의 협조로 진행되었다.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한 마을 전체 구성원들에 의해 전승되어 온 공동체의 민속 놀이 이므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한 전수 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민속놀이를 전승해온 마을 주민 전체의 역사적인 전승 계보가 존재할 뿐이다.무주군 부남면에서는 1750년경부터 마을 공동체 액막이 세시풍속을 행했다. 의료시설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여러 돌림병이 마을에 돌 때,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질병을 퇴치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으로부터 액운을 막기 위해 섣달 그믐날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 부녀자들이 이웃 마을에 가서 방아를 몰래 갖다가 마을 방앗간 입구에 옮겨놓았다. 디딜방아의 다리에 피 묻은 여자의 속곳을 둘러씌워 세워 놓고 주술적인 제의를 통해 마을로 들어오는 재앙이나 질병을 막아내고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놀이를 행했다.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밤에 부녀자들이 이웃마을의 디딜방아를 가져와 제를 지내는 것이 주요 골자다. 놀이에는 전날 염탐꾼이 방아 위치를 확인하는 치밀함도 있다. 그러면 부녀자들이 방아를 가져오는데 부남의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밧줄로 단단히 방아를 묶어 마을로 돌아왔다. 실제로 그 옛날 대소마을 주민들은 마을에서 7km나 떨어진 마을에서도 방아를 가져와 디딜방아액막이놀이를 했다고 한다.방아에 부녀자들의 속곳을 엮어 걸고 마을 입구 방앗거리에 거꾸로 세워 놓으면 농악대가 흥을 올리며 논다. 그리고 쌀을 거둬 고사를 지낸다. 그러면 방아를 잃었던 마을 주민들이 고기와 술을 사들고 찾으러 왔다고 한다.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화동조와 흥을 돋우는 농악조, 음식을 만드는 제수조, 방아를 훔치는 방아조, 제례를 준비하는 제례조로 인원을 짜서 진행한다.진행과정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풍물패를 앞세우고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는 거리굿을 시작으로 30여명의 여인들이 디딜방아를 이웃마을에서 몰래 가져오며 노는 창거리굿, 제수를 준비하고 사람들과 풍물패가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가 방아를 가져오는 방앗거리제가 이어진다. 제례가 끝나면 마을 대표가 “오늘 방앗거리를 무사히 마쳤으니 우리 한번 신명나게 놀아 봅시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함께 흥겨운 놀이판을 벌이며 디딜방아액막이놀이는 끝이 난다.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놀이마당은 길거리 굿, 제2놀이마당은 창거리굿, 제3놀이마당은 짓거리 굿, 제4 놀이마당은 합거리 굿, 제5 놀이마당은 뒤풀이 굿이다. 춤과 농악, 제례의식이 한데 펼쳐지는 종합 민속놀이인 것이다. 주민들은 시연을 하며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마을과 마을이 단합하고 주민들간에도 돈독한 정을 나누게 된다고 한다.◎특징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의 목적은 처음에는 마을이 처한 상황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유형 중에서 선택하여 시기, 장소 등도 달리하여 연행되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세 가지 목적을 통합하여 음력 정월대보름 동제 형식으로 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부녀자 중심이었던 주술적 제의가 산간 오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남성들이 협조자로 참여하면서 유교적 상·하 당산제와 병행하여 치러지게 되어, 본래의 무속적 주술성에 유교적 제의가 곁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전통축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의 일체감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는 것이 목적이다. 이렇듯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공동체에 해를 주는 액을 방지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제액초복(除厄招福)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내용면에서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첫째 <음력 정월 대보름 동제 형식>은 한 해 마을의 무사안녕을 위했고, 둘째 <전염병 퇴치 형식>은 마을 주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했으며, 셋째 <기우제 형식>은 풍요와 다산을 목적으로 행해졌다.[디딜방아 액막이 놀이 연희과정]부남면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총 다섯 과장으로 구성된다. 연행순서는 다음과 같다.제1과장 : 상당 산신제 및 당산제(입장,지신밟기,다리밟기,짚섬 징검다리 건너기,방앗거리로 이동하기,상당 산신제,하당 당산제) 모든 주민들이 방앗거리 두 패로 나뉘어 나오면서 노는 놀이인데 농악조(13)가 선두에 서고, 뒤이어 기수조(15), 제례조(7), 디딜방아 운반조(30), 제수 장만조(11), 화동(4) 순으로 풍악에 맞추어 좌우로 두 손을 흔들며 방앗거리로 나와 원을 2바퀴 돌며 논 다음 농악조는 방앗거리를 계속 돌면서 놀고 방아 운반조는 이웃마을로 방아를 떼러 가면서 놀고, 제수 장만조는 마을을 돌아가며 노는 과정이다.제2과장 : 액막이 디딜방아 훔쳐오기(액막이 디딜방아 훔치러 출발하기,실바우 방앗간으로 가는 길,꼭두상여와 운구용품 내려놓기,디딜방아 훔치기,디딜방아를 빼앗긴 실바우 방앗간 사람들의 통곡,훔친 디딜방아 모셔오기) 중년 여인네들이 디딜방아를 이웃 마을에서 몰래 떼어오며 노는 놀이인데 앞잡이가 선창하면 유대군들이 뒤에서 후창(후렴)을 하며 짓궂게 노는 과정이다.제3과장 : 디딜방아 액막이 제의(돌림병 환자의 집 안과 밖,디딜방아 액막이 의식과 쫓겨나는 역신들,디딜방아 옷 입히기,삼거리에 디딜방아 거꾸로 세우기,디딜방아에 금줄 두르기,축귀 제의) 젊은 여인네들이 제수를 장만하기 위하여 바가지, 자루를 가지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제수거리를 거두어 제수 장만을 위해 절구질을 하면서 노는 놀이이다.제4과장 : 액막이 옷 불사르기 및 액땜 연날리기(액막이 옷 불사르기,액땜 연날리기) 방앗거리에서 제수조와 어울려 놀던 농악대가 마을 어귀까지 나가 방아조를 맞아 데리고 들어오면서 때맞추어 제수조는 장만한 제수를 머리에 이고 함께 나와 뒤를 이어 따라가며 놀다가 방아조가 일정한 장소에 방아를 내려놓고 가면 제수조는 제수를 방아앞에 내려놓는다. 농악조, 방아조, 제수조가 한데 어울려 방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4바퀴를 도는 동안 제례조는 방아를 거꾸로 세워놓고 여인네들의 고장중의를 입혀 고정시키고 제수상을 차려놓은 다음 방아 앞에 모두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절차에 따라 제를 올린다. 거리제를 지내고 나서 액막이 고사 노래를 부른다.제5과장 : 뒤풀이(뒤풀이 풍물굿) 제례가 끝나자마자 마을대표(지금의 이장)가 “오늘 방앗거리제를 무사히 마쳤으니 우리 한번 신명나게 놀아봅시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면 온 마을 사람들은 환호하게 되고 곧이어 원을 그리면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방아 2개를 가지고 서로 어루는 등 한데 어울려 짜릿한 감동으로 신명나게 한바탕 어울리고 끝이 나는 놀이이다.전국민속경연대회는 부남면 방앗거리 놀이가 질병, 안녕을 기원하는 기능에서 놀이의 기능으로 전이되는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 놀이가 재해석되고 창조된 측면은 훔친 방아 하나의 놀이를 쌍 방아로 등장시켜 방아끼리 서로 어르며 애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연출로 다양한 볼거리를 끌어냈고 놀이의 마지막 부분에는 삼나무껍질에 불을 붙여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집단적 신명을 창출해내었다. 기존의 소복차림의 의상에 액을 물리치는 색의 상징인 붉은색을 가미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현재 무주군 방앗거리 놀이의 전승복식은 여자의 경우 흰색치마, 흰색저고리, 붉은색 허리끈과 복주머니, 흰 두건이다. 붉은색의 상징은 액운을 막아내는 것이다.◎전수교육 현황무주군 부남면 대소마을은 2017년 9월 현재 기준 90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도시로 많이 이주해서 놀이를 전승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현재 네 개의 마을이 힘을 모아서 전승하고 있다. 80여명이 모이는 연습은 1년에 3~4번 정도 하고 있으며, 행사를 앞두고 모인다. 유재두 보존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전수교육관이 없어서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타 지역 공연을 위해 차량을 타고 이동할 때에도 놀이와 관련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교육한다고 한다.처음에는 부녀자들이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선뜻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전통을 보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다만 젊은이들이 마을에 없기 때문에 전수교육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마을 내 어린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요즈음은 화동조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무주 부사모(부남을 사랑하는 모임) 농악단이 농악을 맡고 있는데, 좌도 농악으로 현재 22명이 활동하고 있다. 농악단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연습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무형문화재를 전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 간 화합을 도모하고 여러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마련되고 있다. |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남녀노소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놀이다. 주로 여성주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단골이 주재하는 주술적 액막이에 남성의 유교적 당산제가 함께 이루어지는 특징이 있다. 제의와 더불어 노래, 춤, 그리고 사설로 이어지는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종합예술이다. 특히 지역 문화사 측면에서 여성 제의로서의 예술성과 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다.마을춤이란 공동 생활권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춤이다. 또한 지역의 강한 공동체성, 제의성, 생산성, 오락적인 축제성을 갖춘 해당 지역만의 독특한 특징이 스며든 춤이다. 부남 지역의 춤은 노래와 놀이가 적절히 안배된 종합적인 마을 축제를 통해 보전되고 있다.부남디딜방아액막이 놀이는 평지가 아닌 가파른 산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박자가 느리다. 화순, 김제와 같은 평야지역의 유사한 놀이와는 차이가 있다. 동아줄을 묶어서 디딜방아를 이동시키는 것 역시 부남 지역의 특징이며 가치이다. | ||
31 | 무주 안성낙화놀이 | 놀이 | 무주 안성낙화놀이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16-10-14 | 56 | 무주군 | 무주낙화놀이는 자연친화적인 전통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재료의 측면에서 볼 때도 친환경적이다. 두문 마을은 한때 잠업이 융성했던 마을로 뽕나무가 전략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누에가 생산해내는 실보다는 누에 자체가 웰빙 음식이 되는 새로운 산업 환경 속에서 뽕나무는 그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절 위기에 놓인 낙화놀이가 다시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 잠업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아직도 마을 곳곳에 주재료인 뽕나무가 있어서 낙화봉을 만드는 재료는 충분하다. 또한 석유 대신에 천연재료인 쑥을 사용하여 타 지역과는 다른 ‘자연의 향기’를 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낙화놀이 보존회는 2009년 낙화놀이에 사용하는 낙화봉 디자인과 2010년에는 제조방법을 특허등록 하였다. 어둠 속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물 위로 떨어지는 불꽃이 물에 비치면서 물 속 깊은 곳에서 표면으로 불꽃들이 솟구치는 환영을 만들어 낸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불꽃들과 겹치고, 저수지 주변에서 이는 바람소리와 여기저기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미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류 역사상 불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더라도 낙화놀이는 매우 소중한 전통놀이 이다. 보존회는 낙화놀이를 계기로 두문마을을 문화마을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방문객들이 마을에 와서 자연과 더불어 마음의 안식을 얻고 가기를 희망한다. 지역의 다양한 유형문화재와 더불어 향악의 전통도 이어가려고 한다. 특히 이러한 ‘교육적 공간’이 주는 장소정체성은 처음 낙화놀이의 전승주체였던 서당의 생도들에게까지 연결된다. 더불어 마을뿐만 아니라 무주군의 대표축제인 반딧불 축제의 방문객 증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역 대표 축제인 반딧불 축제에서 펼쳐지는 낙화놀이는 남대천에 어리는 불빛과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이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 무주 낙화놀이는 한국의 민속사회에서 황해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연행된 낙화놀이와 같은 지역 전통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주 낙화놀이는 주로 삼월 삼짇날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및 바쁜 농사철을 피해 연행되었다. 또한 물이 있는 곳에서 연행되었으며, 불꽃이 떨어질 때 물에 비치는 불꽃의 영상 효과를 즐겼다.한 동안 중단되었던 무주 낙화놀이는 2007년부터 복원과정을 통해 약 11년동안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2016년 10월 14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줄을 타고 떨어지는 불꽃들이 마치 꽃과 같다고 해서 ‘낙화’놀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숯가루, 소금, 마른 쑥 등을 넣어 만든 ‘낙화봉(숯봉지)’을 긴 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타들어 가는 불꽃과 소리의 조화가 매혹적이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낙화놀이는 경기도 여주의 해촌 낙화놀이, 안동 하회마을의 선유 줄불놀이, 함안읍성 낙화놀이, 마산 진동의 낙화놀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축제적 상품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두문마을에는 약 300년 전에 ‘흥감제’라는 서당이 있었는데, 무주 낙화놀이를 연행한 주체는 서당의 생도들로 파악된다. 서당은 인근에서 두문 마을에만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웬만한 인근 지역의 큰 마을에서 낙화놀이를 했다고 한다면 두문마을을 제외한 다른 마을의 낙화놀이는 그 놀이 주체가 서당 학동들이 아닌 주민들이나 그들 중 특정한 부류의 사람이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두문마을 낙화놀이의 특이성은 놀이의 주체에서 비롯된다. 서당의 학동들은 소년층부터 청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낙화놀이를 하자는 제의가 있으면 이 서당 학동들 중에 상급 학생이 주동자가 되어 낙화놀이를 준비했다고 한다.낙화놀이를 연행하는 시기는 모내기 전이라고 언급되는데,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본격적인 농사일을 앞두고 서당 학동들이 그들 스스로가 즐기기 위해 혹은 주민들에게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낙화놀이가 연행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즉 농번기를 앞두고 농사일에 필요한 주민의 단합과 노동의 효율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훈장을 비롯한 학식 있는 마을 서생들의 소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이날은 떡과 술을 넉넉하게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이 먹고 즐겼다. | ◎ 전승내용낙화놀이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1. 뽕나무 작업 → 2. 뽕나무 태우기 →3. 뽕나무 숯 만들기 →4. 봉나무 숯가루 만들기 →5. 심지용 쑥 만들기 →6. 한지 펴기 →7. 숯가루 및 천일염 올리기 →8. 쑥심지올리기 →9. 한지말기 →10. 새끼줄 꼬기 →11. 낙화봉 완성 →12. 낙화놀이주 재료인 숯봉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숯을 만들어야 한다.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뽕나무를 구해서 숯이 될 때까지 태운다. 뽕나무를 쓰는 이유는 뽕숯이 솔숯보다는 입자가 세밀하고 참숯보다는 밀도가 덜하여 인화력(引化力), 지화력(持火力), 산화력(散花力) 등이 좋기 때문이다. 다른 나무에 비해 뽕나무는 재가 될 때까지 다 타지만 다른 나무는 도중에 꺼진다. 참고로 솔숯은 지화력이 부족하고, 참숯은 지화력은 양호하나 인화력이 부족한 결점이 있다. 뽕나무가 숯이 되면 불을 끄는데, 이때 습기를 먹지 않도록 흙으로 덮어 끈다. 불씨가 꺼진 뽕나무 숯을 적당한 나무 막대나 이와 비슷한 도구를 이용하여 부순다. 작게 부숴진 뽕나무숯은 넓적한 돌이나 병, 망치 등을 이용하여 빻는다. 잘게 빻아진 뽕숯가루를 ‘얼기미’라 부르는 체로 곱게 걸러낸다. 이 과정에서 생긴 뽕숯 조각들은 다시 빻아 걸러내는 과정을 반족하여 적당한 분량의 뽕숯가루를 준비한다.뽕숯가루가 준비되면 가로로 길게 자른 한지를 펴고 그 위에 적당한 분량의 숯가루를 고르게 편다. 그리고 햇볕에 말려 가능한 한 습기를 제거해 적당히 굵은 소금을 고르게 뿌린다. 그리고 한쪽 끝에는 쑥이나 수리취를 햇볕에 말리고 이를 다시 비벼 심지 모양으로 작게 뭉친 ‘짓(깃)’을 놓는다. 그 다음에는 한지를 김밥을 말 듯이 말면 긴 타원 모양의 숯봉지가 만들어지는데, 이때 명주실을 이용하여 심지 부분을 묶고 적당한 간격으로 세 마디 매듭을 짓고 윗부분에는 철사나 실, 혹은 노끈을 이용하여 줄에 걸 고리를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낙화봉이 완성되면, 습기를 먹지 않도록 햇볕에 말린다. 원래 숯과 소금이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낙화봉 제작에서 습기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낙화봉 다 제작하고 나서는 낙화놀이 준비팀은 낙화놀이가 재현될 저수지로 가서 낙화봉 매달 줄을 고정시킬 지주를 땅에 박고 줄을 매달았다.예전 낙화놀이 낙화봉은 둘둘 말린 김밥모양이었고, 소금, 무명실, 심지용 짓을 모두 사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낙화놀이 재현시에 불꽃이 끊기는 시간을 줄이고 연속적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한 것이다. 이러한 과배기형 제작방식은 함안읍성낙화놀이에서 볼 수 있는 숯봉지의 형태와 같다.예전방식의 밋밋한 몸통의 숯봉지는 실로 매듭만 잘 지어주면 숯가루가 타기도 전에 쏟아지지 않지만, 불꽃이 떨어져 흩날리는 간격이 매우 길었다. 과거에는 그러한 ‘느림과 여백의 미학’이 멋스러운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광속을 추구하는 속도의 전쟁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에 맞지 않는 지루하고 볼품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전통적인 멋과 흥취를 잃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화려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낙화봉을 제작하고 있다.◎전승현황낙화놀이를 전승하는데 주로 참여하는 마을 주민은 서홍원 운영위원장 이하 마을이장과, 성영석, 서병무, 박일환, 박천생, 박면우, 이병춘 등이다. 서홍원은 이 마을 출신으로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귀농을 했다. 2016년인 작년에 위원장을 맡아서 올해 2년차이다.무주낙화놀이는 단체종목이기 때문에 특별히 전수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고 있다. 전승하는데 어려운 점은 열악한 작업조건이다. 낙화봉을 만들기 위해 숯가루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가 호흡기를 통해 전달되기 쉽다. 그런데 현재는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수많은 관광객을 위한 부대시설 마련이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보존회는 다양한 정부 사업에 참여하여 마을 가꾸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전수교육 현황현재 마을 내 위치하고 있는 두문 소류지 저수지에는 한 번 행사를 치를 때마다 1000여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시연은 주로 초파일, 단오, 유두날, 백중과 같이 특별한 절기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휴가철에도 하고 있다. 또한 무주 산골영화제를 두문마을에서 개최하면서 연계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라북도 프로젝트로 ‘인성 프로그램’과 같은 것을 연계하여 서당에서 책을 읽고 낙화봉을 직접 만들어 놀아보는 체험도 진행한다.타지역 중학교 아이들과 무주군내 학생들도 마을을 방문해서 낙화봉 체험을 하고 있다.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학생들이 체험할 경우에는 낙화봉의 길이를 좀 더 짧게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낙화봉이 모두 탈 때까지 한 시간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데 학생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기 힘들어 30분 정도로 단축하기 위해서다.낙화봉을 만들기 위해 주로 교육하며 강조하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바짝 마른 뽕나무 숯을 굽는다. 숯을 구우면 바로 큰 깡통에 넣고 깊이 30-40cm 정도 땅을 파서 묻어 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산화되면서 숯가루가 재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다음에는 숯가루를 곱게 갈아서 밀가루와 같이 가루를 내야 한다. 한지에 3cm, 16cm 숯가루를 뿌린다. 천일염 소금은 바짝 말려서 볶아서 가루를 만든다. 이렇게 가루로 만든 천일염을 숯가루 위에 뿌리면 소금이 불에 붙으면서 ‘톡 ~ 톡 ~’ 소리를 내서 보는 이들의 청각을 즐겁게 한다. 다음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쑥의 사용이다. 쑥을 돌돌 말아서 쑥 심지를 만들어 초입과 끝에서 돌돌 말아서 꽈배기 같이 꽈준다. 다른 지역의 경우 석유를 사용하여 낙화봉이 탈 때 좋지 않은 냄새가 나서 불쾌감을 주기도 하는데, 두문마을의 경우 쑥 향기가 좋게 나서 매우 특색 있다. 낙화놀이 시연을 위해서 약 30여명의 주민들은 낙화봉을 3,000개씩 만든다. 두문마을 주민들은 전통놀이를 보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단합된 힘을 보여주고 있다. | 무주낙화놀이는 자연친화적인 전통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재료의 측면에서 볼 때도 친환경적이다. 두문 마을은 한때 잠업이 융성했던 마을로 뽕나무가 전략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누에가 생산해내는 실보다는 누에 자체가 웰빙 음식이 되는 새로운 산업 환경 속에서 뽕나무는 그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절 위기에 놓인 낙화놀이가 다시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 잠업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아직도 마을 곳곳에 주재료인 뽕나무가 있어서 낙화봉을 만드는 재료는 충분하다. 또한 석유 대신에 천연재료인 쑥을 사용하여 타 지역과는 다른 ‘자연의 향기’를 내고 있다.마을 주민들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낙화놀이 보존회는 2009년 낙화놀이에 사용하는 낙화봉 디자인과 2010년에는 제조방법을 특허등록 하였다. 어둠 속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물 위로 떨어지는 불꽃이 물에 비치면서 물 속 깊은 곳에서 표면으로 불꽃들이 솟구치는 환영을 만들어 낸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불꽃들과 겹치고, 저수지 주변에서 이는 바람소리와 여기저기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미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류 역사상 불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보더라도 낙화놀이는 매우 소중한 전통놀이 이다.보존회는 낙화놀이를 계기로 두문마을을 문화마을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방문객들이 마을에 와서 자연과 더불어 마음의 안식을 얻고 가기를 희망한다. 지역의 다양한 유형문화재와 더불어 향악의 전통도 이어가려고 한다. 특히 이러한 ‘교육적 공간’이 주는 장소정체성은 처음 낙화놀이의 전승주체였던 서당의 생도들에게까지 연결된다. 더불어 마을뿐만 아니라 무주군의 대표축제인 반딧불 축제의 방문객 증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역 대표 축제인 반딧불 축제에서 펼쳐지는 낙화놀이는 남대천에 어리는 불빛과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이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 ||
32 | 부안농악 | 농악 | 농악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1987-12-31 | 7 | 부안군 | 국내에 3대 상쇠로 알려진 유지화, 이옥주, 나금추 중에 두 분은 전라도 가락과 경기도 가락이 어울려 있으나 나금추만이 전라도 가락의 맥을 독보적으로 지켜오고 있다는 평가다. 특기사항으로는 부포놀이를 바탕으로 한 상쇠춤의 기능인으로서 춤사위나 그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부리는 기교가 넘쳐 그의 꽹과리 소리는 ‘신령이 감동하는 소리’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동작은 기예가 완숙한 선녀놀이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상모의 두루미털을 전후, 상하, 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꽹과리채를 저으며 춤을 추면서 학이 나는 듯한 상쇠놀이의 진수를 보여준다. 상쇠놀이의 특징은 부포놀이와 진법놀이, 덩더궁이, 오채질굿으로 집약할 수 있다. 전라도 특유의 춤사위를 완전 소화하며 거기에 다양한 기교가 넘치는 상쇠가락, 그리고 넘치는 생동감까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1983년 10월에는 국립극장 명무전에 초청되어 상쇠춤을 선보였으며 유일하게 온작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평생동안 전라도의 가락과 맥을 유유히 지켜오고 있다. 또한 5채질굿과 같이 느리면서도 2분박과 3분박이 불규칙적으로 얽혀져 있어 그 구조 파악이 대단히 까다로운 부분의 연주에서도, 명쾌한 해석으로 흔들리지 않는 연주를 하고 있다. 천부적인 재질 외에도 그가 많은 전문 공연 단체에서 수많은 전문 잽이들과 교류하고 그러한 공연의 틈바구니에서 시험하고 씨름하면서 일구고 얻어 낸, 그의 말대로 득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금추는 특히 짧은 시가의 음을 약하게 구사하는 타법에 있어 독특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쇠가락의 연주에서는 대개 쇠를 받치고 있는 뒷손을 적절히 이용하여 음색과 강약을 조절하는데, 이러한 방법에는 쇠를 완전히 막고 치는 주법과 순간적으로 스치듯 막았다 떼며 소리를 내는 두가지가 있다. 이때 나금추는 주로 후자의 방법으로 연주함으로써 개방음도 아니고 완전히 막고 치는 소리도 아닌, 작지만 투명한 소리를 아주 독특하고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 이렇게 쇠가락이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연속적인 울림을 유지함으로써,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우도농악 특유의 유연함을 고도로 살리고 있어서 그 예술적 가치를 볼 수 있다. | 2014-11-28 | 부안농악 명인들의 행보는 전북지역 호남우도농악의 중심지인 정읍, 고창, 부안, 김제 등의 활동영역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 중심에 있는 정읍농악 명인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부안농악의 중시조는 김바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부안농악 꽹과리 계보 중에서 가장 상위권역에 속하며 일설에는 1896년 경에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원우동 마을에서 태어나, 6.25 직후에 사망했다고 한다.보유자인 나금추는 1959년 19세에 남원여성농악단에 입단하고 1960년 20세 이후 남원춘향여성농악단에 소속되어 상쇠로 전국을 돌며 농악공연을 다닌다. 1985년 45세에는 이리농악단 상쇠로 제 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 대회 출전을 위하여 판굿을 짜는데 그의 기량과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단체상 외에 나금추에게 개인 연기상도 동시에 주어졌다. 이후 1987년 47세에 전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7-1호 지정된다. 치배 편성 기수, 앞치배, 잡색, 기타로 구성된다.기수: 용기 1, 농기 1, 영기 2앞치배: 쇠, 징, 장고, 북, 소고(채상소고)잡색: 대포수, 양반, 각시, 조리중 각 1명씩기타: 12발 상모, 나발, 태평소 | ◎ 전승내용부안농악 판굿의 순서는1) 어림굿(내드림)입장가락은 느린 삼채로 대신하여 치기도 한다. 삼채로 입장할 때는 방울진을 쌓지 않고 바로 원진을 이루어 휘머리를 치고, 짧게 이루어 끊은 다음 인사굿을 친다.2) 첫째마당- 오채질굿(느린오채질굿- 우질굿- 좌질굿-풍년질굿-양산도-느린삼채- 자진삼채- 삼채매도지)첫째 마당이나 둘째마당의 삼채굿을 치는 사이에 상쇠의 신호로 치배들이 각각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등을 기대는 놀이인 콩등지지나 밭 매는 흉내를 내는 놀이를 삼채장단에 맞추어 넣기고 하였다.3) 둘째마당- 오방진굿(느린 오방진-빠른 오방진- 굿거리- 느린삼채-자진삼채-삼채매도지)빠른오방진이 끝나면, 오방진을 한바탕 쌓느라고 달음박질로 굉장히 숨이 차기 때문에 한 숨 돌릴 겸 굿거리를 연주하였다. 굿거리는 행진할 때 치는 ‘외마치질굿’과는 다르다.4) 셋째마당- 노래굿(굿거리-농부가- 풍년가-느린삼채-자진삼채-삼채매도지)굿거리에서 이어서 ‘농부가’를 주고 받으며 불렀으며, 농부가가 끝난 다음에는 ‘풍년가’를 부르기도 했다.5) 넷째마당- 호호굿(호호굿- 호호뒷굿- 자진삼채- 삼채매도지)호호뒷굿을 칠 때, 다래기(달아치기)를 하기 전에 치배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쇠들의 ‘일광놀이’에 이어서 연극적인 놀이인 ‘도둑잽이’를 넣기도 한다.6) 다섯째마당- 개인놀이◎전승현황부안읍면 농악단체 현황은 2011년 3월 현재 17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부안풍물굿보존회, 천지인, 주산풍물단, 동진 메아리 풍물단, 행안 풍물단, 계화자치풍물단, 보안 한소리풍물단, 변산 풍물단, 천둥소리, 산울림 풍물단, 백산 중앙 풍물단, 백산 파랑새 풍물단, 상서 터울림 풍물단, 하서 부녀 풍물단, 백합노인대학 풍물단, 위도 망월봉 풍물단, 바람꽃 풍물단 등이다.◎전승계보부안농악과 나금추 상쇠의 전승계보를 명확히 하기는 쉽지 않다. 대략 노재일- 박만풍- 김도삼- 박성근- 김재옥- 나금추로 이어진다.나금추는 김재욱 이외에는 정식으로 스승을 두어 본 적이 없다. 현재 연주하고 있는 가락도 처음에 김재옥으로부터 물려 받은 가락에다 살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장기로 삼는 부포놀음도 김재욱으로부터 기초를 닦고 이후에 독공으로 이를 완성시킨 것이라 한다. 아무튼 나금추는 김재옥과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만난 이름 모를 지역 농악인,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스스로 스승이 되어 오늘날의 기량을 다듬은 셈이다. | 국내에 3대 상쇠로 알려진 유지화, 이옥주, 나금추 중에 두 분은 전라도 가락과 경기도 가락이 어울려 있으나 나금추만이 전라도 가락의 맥을 독보적으로 지켜오고 있다는 평가다.특기사항으로는 부포놀이를 바탕으로 한 상쇠춤의 기능인으로서 춤사위나 그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부리는 기교가 넘쳐 그의 꽹과리 소리는 ‘신령이 감동하는 소리’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동작은 기예가 완숙한 선녀놀이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상모의 두루미털을 전후, 상하, 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꽹과리채를 저으며 춤을 추면서 학이 나는 듯한 상쇠놀이의 진수를 보여준다. 상쇠놀이의 특징은 부포놀이와 진법놀이, 덩더궁이, 오채질굿으로 집약할 수 있다. 전라도 특유의 춤사위를 완전 소화하며 거기에 다양한 기교가 넘치는 상쇠가락, 그리고 넘치는 생동감까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1983년 10월에는 국립극장 명무전에 초청되어 상쇠춤을 선보였으며 유일하게 온작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평생동안 전라도의 가락과 맥을 유유히 지켜오고 있다.또한 5채질굿과 같이 느리면서도 2분박과 3분박이 불규칙적으로 얽혀져 있어 그 구조 파악이 대단히 까다로운 부분의 연주에서도, 명쾌한 해석으로 흔들리지 않는 연주를 하고 있다. 천부적인 재질 외에도 그가 많은 전문 공연 단체에서 수많은 전문 잽이들과 교류하고 그러한 공연의 틈바구니에서 시험하고 씨름하면서 일구고 얻어 낸, 그의 말대로 득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나금추는 특히 짧은 시가의 음을 약하게 구사하는 타법에 있어 독특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쇠가락의 연주에서는 대개 쇠를 받치고 있는 뒷손을 적절히 이용하여 음색과 강약을 조절하는데, 이러한 방법에는 쇠를 완전히 막고 치는 주법과 순간적으로 스치듯 막았다 떼며 소리를 내는 두가지가 있다. 이때 나금추는 주로 후자의 방법으로 연주함으로써 개방음도 아니고 완전히 막고 치는 소리도 아닌, 작지만 투명한 소리를 아주 독특하고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 이렇게 쇠가락이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연속적인 울림을 유지함으로써,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우도농악 특유의 유연함을 고도로 살리고 있어서 그 예술적 가치를 볼 수 있다. | |
33 | 죽염제조장 | 공예 | 죽염제조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1999-10-08 | 23 | 부안군 | 역사적으로 볼 때 죽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간 약제로서 역사적 전통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약용 기능은 외국의 대학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현재도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되어 상품화가 되고 있고,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 죽염제조장(竹鹽製造匠)은 죽염 제조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소금은 인간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예로부터 식품조미료 뿐만 아니라 미용재료, 공업용 원료로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죽염은 이러한 소금을 고온에서 여러 번 가열함으로써 몸에 해로운 성분들을 없애 만든 소금이다. 죽염의 유래에 대해서는 1300년 전부터 불가(佛家)에서 민간요법으로 전승되어온 것이라고도 하고, 근대에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 1909~1992)이 새롭게 발명한 것이라고도 한다. 민간요법 분야에서 죽염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각종 염증 및 소화기 계통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온 민속약으로 보고 있다. 소금을 볶아서 쓰거나, 대(竹)통 속에 넣고 한두 번 구워서 체했을 때나 소화가 잘 안될 때, 상처가 났을 경우 지혈제나 소독제, 이를 닦는 재료 등으로 써왔다. 이러한 민간요법은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에 남아 있는데, 이를 ‘구염(灸鹽)’ 또는 ‘약소금’이라 부른다. 유래에 관한 또 다른 의견은 현재의 ‘죽염’을 만들어낸 김일훈의 저서 「우주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일훈은 저서에서 죽염은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을 남해안 일대의 푸른 왕대나무에 다져넣고, 거름기 없는 황토로 입구를 막아 쇠 가마에 넣은 뒤, 소나무 장으로 태우는 공정을 8번 반복하고, 9번째는 송진으로 1,500℃ 안팎의 고열로 녹여 내린 신물질’이라고 말한다. 죽염은 이름 그대로 대와 소금을 주원료로 하여 만든 것이다. 조수와 땅 밑에 있는 광석물의 영향을 받아 특유의 암약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서해안의 천일염, 천일염의 성분인 핵비소와 대나무 속에 들어있는 맑은 물 속의 핵비소를 추출·합성해 만든 것이 죽염이다. | ◎ 전승내용 허재근은 11살 때부터 개암사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관솔을 따 소금 태우는 심부름을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죽염의 제조과정인 것을 알게 됐다. 허재근은 개암사에서 스승이었던 현응 대종사로부터 죽염 제조 비법을 전수 받아 연구·개발하였고, 김인석으로 이어졌다. 이후 김인석을 이어 김입분이 이수를 받았고, 현재 강승현이 전수장학생으로 있다. ◎ 제작과정 (1) 남부지방에서 3년 넘게 자란 대를 잘라 만든 대나무통에 서해안에서 만든 천일염을 넣고 입구를 황토로 막는다. 이 때 대나무는 직경 7~8㎝정도 것을 써야 최상의 죽염을 만들 수 있다. 직경이 크면 대에 함유되어 있는 수분이나 액 성분이 대통에 담긴 소금에 골고루 스며들지 못한다. 죽염에 알맞은 대나무는 3~5년생 되는 대나무가 좋다. 2년생 이하의 대나무는 약성이 부족하고, 5년이 넘어가면 약성이 노화되기 때문이다. (2) 소금을 담기위해 대나무 마디를 경계로 자른다. 그리고 그 속에 소금을 다져 넣고 황토로 만든 가마에 넣는다. (3) 황토 가마에 소나무장작으로 불을 지펴 800-900℃ 온도에서 8시간 이상 굽는다. 소나무는 국내산 소나무만을 사용한다. 소나무에 들어있는 송진 때문에 화력이 좋기 때문이다. (4) 가마에서 대통은 불에 타서 재가 되고, 소금은 녹으면서 굳어 하얀 기둥처럼 된다. 이 때 황토 가마안에서 구워지는 죽염은 연기와 함께 유해 물질을 제거하고, 대나무, 황토, 소나무에서 나오는 천연물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5) 구워진 죽염은 미세한 분말이 날리지 않도록 황토물을 정수해 걸러낸 지장수를 뿌린 후, 대나무에 단단히 압축을 시켜 담는다. 대나무통에 다져진 죽염을 황토가마에서 재차 굽는데, 이와 같은 과정을 8번 반복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구울수록 소금이 흰색에서 연한 회색빛으로 변하게 된다. (6) 마지막 아홉 번째 구울 때 사용되는 가마는, 앞의 가마와는 구조가 다르다. 8번째 과정까지 구워진 죽염은 마지막 가마에서 1500℃이상 고열로 굽는다. 구워진 죽염은 다른 과정과 달리 자색을 띈 용암처럼 녹아 흘러내려 굳게 된다. 이렇게 구워진 소금을 자죽염 또는 죽염이라 한다. 굳어 단단해진 자죽염을 먹기 편하도록 작은 알갱이나 가루로 만든다. ◎ 전승현황 허재근과 그의 이수자들은 1년 또는 2년에 한 번씩 부안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시연행사를 갖는다. 행사는 보통 하루 동안 진행된다. 허재근과 그의 이수자들 모두 참여해,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죽염의 역사, 생산 과정, 효과 등을 설명한다. 행사 때 죽염 재료와 도구들을 전시하고 죽염 생산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고령에 이른 허재근은 죽염과 관련한 이전처럼 활발한 사회활동을하지 못한다. 다만, 그의 이수자들에게 자문을 해주거나 교육을 하고 있으고, 가끔 지역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의 이수자였던 김인석은 죽염회사에 다니다가 고창에 죽염생산 회사를 설립하고, 허재근으로부터 전수받은 방식으로 죽염을 생산하고 있다. 그는 여러 번 허재근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허재근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인석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전해준다. 김인석의 회사에는 또다른 이수자 김입분과 전주장학생 강승현이 근무하고 있다. 김인석, 김입분 외에도 다른 1명의 이수자가 있었으나 사망했다. 전수장학생 강승현은 김인석의 죽염제조회사에 입사한 지 10여년 정도 됐으며, 2~3년 전에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강승현은 허재근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고, 죽염 제조 공장에서 근무하며 김인석과 김입분으로부터도 죽염제작 기술을 배우고 있다. 강승현을 비롯한 허재근의 전수자들은 부안의 다른 종목 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보유자의 전수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그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서 정보교환, 부안무형문화재의 발전방향에 관한 논의 등을 하고 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죽염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간 약제로서 역사적 전통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약용 기능은 외국의 대학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현재도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되어 상품화가 되고 있고,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 ||
34 | 대목장 | 공예 | 대목장 | 전라북도무형문화재 | 2004-09-10 | 30 | 부안군 | 대목장은 한국의 자연 환경과 문화적 배경의 틀 안에서 발달한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대목장의 기술과 지식은 한국 전통 건축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목장의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완성된 한옥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의 전통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 왔다. 대목장은 그동안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구현하고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통 건축물을 보존한다는 사회적·경제적 기능을 담당해왔다. |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전통적으로 ‘목장(木匠)’또는 목수라고 불렀다. 목장이 담당하는 여러 가지 작업 중에서 ‘대목’은 특히 궁궐이나 사찰 또는 가옥 등과 같은 목조 건축물을 짓는 일을 일컫고, 그런 대목의 일을 담당하는 목수를 대목장이라고 부른다.한편 전통적인 목조건축물을 일컬을 때에도 ‘대목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 목장은 ‘소목장(小木匠)’과 ‘대목장(大木匠)’으로 구분되는데 소목장은 목재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가구나 생활용품인 궤·문갑·책상·밥상·장롱 등을 제작하는 목수를 말하며, 대목장은 대규모 건축물을 짓는 목수를 일컫는다. 목조건물을 짓는 데는 목수 외에 기와장이[蓋匠]·흙벽장이[泥匠]·단청장(丹靑匠, 假漆匠)·석수(石手) 등의 긴밀한 협조가 있어야 하지만, 대목이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까닭에 그의 소임이 막중하다.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게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도시행정을 관장하는 전읍서(典邑署)에 경(卿) 2인, 감(監) 4인, 대사읍(大司邑)·중사읍(中司邑) 각 6인, 소사읍(小司邑) 9인, 사(史) 16인, 목척(木尺)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고려시대도 선공시(繕工寺)와 도교서(都校署)의 목업(木業)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는 『경국대전』의 경공장조(京工匠條)에 규정하기를, 선공감에 60인의 목장을 상비하도록 하였는데, 세종 때 서울숭례문(崇禮門)의 재건기록에 따르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는 궁궐과 관아 등 큰 목조건물을 짓지 않게 되어 그 직능이 한층 쇠퇴하였고, 다만 사찰과 사가(私家)의 신축을 통하여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오는 형편이다. | ◎ 전승내용 1935년 부안에서 태어난 김정락은 어린시절부터 김형우, 조형선, 고택영 등에게 한옥건축을 사사받았다. 김정락에 이어 김영철과 김삼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수교육조교로 김영철이 있고, 전수장학생은 김삼석이다. 김영철은 김정락 아들의 친구이다. 김영철은 집 짓는 일을 하다가 김정락의 아들을 통해 김정락을 알게 되어 전수자가 되었다. 김삼석은 김영철의 친형으로 소목장이었다. 김삼석은 김정락과 김영철 아래에서 대목장을 배우려하지 않았으나, 오랜 설득 끝에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김정락은 어렸을 때 도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목수의 길에 들어선다. 동네에서 도장을 파면서 밥벌이를 하다가, 목수를 쫓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김정락이 살던 옆마을에 조형선이 있었고, 그를 따라 다니면서 목수를 배웠다. 본격적으로 목수를 시작한 것은 10대 후반 이었고, 20대 혼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대목장을 하는데 있어 나무를 구해오거나 다루는 일에 능숙함이 필요하다. 요즘은 나무를 구입하지만 예전에는 동네 유지의 산에서 나무를 해왔다. 집 지을 목재가 필요하면 인근 산에 올라 나무를 직접 베어서 한쪽에 쟁여 놓고 말린다. 2-3년 가량 말리면 좋은 재료가 된다. 나무를 건조시킬 때 나무 쌓인 윗부분을 덮어놓고, 옆에는 터놓아서 수분이 빠져나가게끔 한다. 적정하게 말린 나무를 대패질해서 손질한다. 손질한 나무를 갖고서 기둥, 문, 가구 등 작은 소품에서 기둥 까지 모두 제작을 했다. 지금이야 대목장과 소목장이 나뉘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김정락 본인이 직접 다 만들었다. 매년 부안 무형문화재 행사에 참여한다. 부안의 무형문화재 전수관에 모형집, 도구, 옛 가구 등을 전시해 놓고 방문객을 대상으로 설명한다. 현재는 김영철과 지속적으로 김정락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다. 김삼석은 5년 간 전수장학생으로 지정되어 매월 소정의 교육지원비가 이수자에게 지급된다. | 대목장은 한국의 자연 환경과 문화적 배경의 틀 안에서 발달한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대목장의 기술과 지식은 한국 전통 건축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목장의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완성된 한옥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의 전통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해 왔다. 대목장은 그동안 전통적인 문화유산을 구현하고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통 건축물을 보존한다는 사회적·경제적 기능을 담당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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